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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식 전 인천시문화재단 대표이사
인천은 근대적인 천일제염의 선구지로 꼽힌다. 1907년 주안에서 최초로 시험 제조에 성공한 이후 남동, 소래 염전이 개발되면서 1960년대까지 남한 최대의 소금 산지로 군림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1899년에 이미 인천에 농상공부가 관할하는 제염시험장이 설치됐다.

 당시 ‘상공부소관 제염장시험비 예산외 지출청의서(農商工部所管製鹽場試驗費預算外支出請議書) 제35호’ 문서에 ‘바닷가에서 재정 확보의 최고의 방안은 소금 생산과 관리인데 우리나라는 제염에 대해 연구가 되지 못해 흙가마솥에 나무를 때니 비용은 많이 들고 이익은 적다. 제염시험장을 설치해 쇠가마솥과 기계를 도입하고 외국의 좋은 방법을 모방해 소금을 생산하면 이익이 몇 배 많이 나올 것이기에’라는 뜻의 내용이 보인다.

 이 제염시험장 역시 바닷물을 끓여 증발시킨 후 소금을 얻는 전오(煎熬) 방식이기는 했지만 재래의 비능률적인 시설과 방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보자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나라가 직접 나서 외국의 새로운 기계와 기술로 자염 생산을 시행했던 곳 역시도 인천이 최초인 셈이다. 인천 제염시험장 제염기계는 변국선(卞國璇), 이학승(李學承) 등이 일본에서 구입해 온다. 그리고 변국선이 제염시험장 기수(技手)로 임명돼 운영하면서 이듬해 10월 소금 200석을 생산해 수입금 460여 원을 농상공부에 납부했고, 1901년 8월에는 소금 수확량이 212석 8두에 함수저축염(鹹水貯蓄鹽) 양만 2천여 석에 이르는 실적을 올린다. 물론 그해 11월에도 소금 200석을 방매해 은화 240원을 납부한다. 이 같은 사실은 주로 황성신문에 보도되고 있는데 이후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이 신식 제염시험장의 기수 변국선이다. "경상도 고성군 사는 변국선 씨가 소금 구을 의견으로 중추원에 헌의서(獻議書)를 바쳤는데 그 헌의서에 대해 중추원에서 물어볼 말이 있으니 변 씨는 곧 중추원으로 갈지어다"라는 1899년 2월 16일자 독립신문의 ‘변 씨 심방(尋訪)’ 기사를 보면, 그가 자신의 자염 생산 기술을 들어 어떤 제안을 중추원에 냈고 그것이 중추원의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이처럼 그는 애초부터 관료는 아니었고 고성에서 염업에 관련했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더라도 그가 농업이나 수산 분야에 학식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해 5월, 농상공부에서 변국선을 기수로 임명하면서 그가 "뛰어난 제염 기술을 ‘졸업(卒業)’한 바 있어 이번 제염시험장 사무를 위임하기로 했다"는 구절이 그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특히 변국선, 이학승 등이 일본에 갔을 당시 몇 군데 시찰을 했는데, 당시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지사가 "변국선(32)은 일찍이 본방에서 유학한 적이 있다"는 보고를 낸 것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변국선은 제염시험장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판임관(判任官) 6등에서 4등으로 승진을 거듭하다가 1902년에 기수직에서 물러난다. 그 후 1906년 9월 3일에 농림학교(農林學校, 서울농대 전신) 교수보(敎授補)에 임명되고 10월 8일에는 사감까지 겸임한다. 1907년 7월 교수직에서 물러난 뒤 1908년에는 농림사(農林社)라는 회사를 차린 기록도 있는데 이것이 그에 대한 공식 기록의 끝이다.

 여담이지만 이 변국선이 바로 변동림(卞東琳)의 부친이었다는 사실이다. 변동림은 후일 김향안(金鄕岸)으로 개명하는데 천재 예술가 이상(李箱)과 결혼했다가 그가 죽자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와 재혼한 수필가며 미술평론가다. 또 그녀의 이복 언니 변동숙(卞東淑)은 불구의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의 계모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본웅은 이상보다 나이는 네 살 위였으나 둘이 친구처럼 가까웠던 사이다.

 본론에서 벗어나 이렇게 변국선의 딸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내는 것은 근대 한국 역사 최초의 기록을 가진 인천의 신식 제염시험장이 변국선에 의해 우리나라 예술계 최고의 별들과 희미한 인연이나마 닿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거기에 「토지」의 작가 박경리(朴景利)의 부군 김행도(金幸道) 역시도 1948년 주안염전에 기사로 와서 인천 소금 생산에 종사한 사실까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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