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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신 농협대학교 교수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이른바 ‘재판 받을 권리’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다(제27조 제1항). 이는 법원으로부터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법치주의를 실효적으로 담보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법원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심판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 헌법은 3권분립 원리와 사법권 독립을 규정하고 있다(제101조, 제103조). 법원을 ‘국민의 권익보호를 위한 최후의 보루(堡壘)’라고 일컫는 이유는 법원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심판자’의 역할을 흔들림 없이 수행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그런데, 최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추진을 위해 재판을 청와대와 정치권을 설득 내지 압박할 카드로 활용하려 한 사실이 내부 문건을 통해 드러나 국민을 경악하게 하고 있다. 또한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개입하려거나 특정 법관을 뒷조사한 정황을 담은 문건도 추가로 발견돼 국민을 충격에 빠뜨리고 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확보한 문건을 근거로 "박지원 의원 일부 유죄 판결,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파기환송 판결 등을 청와대에 대한 유화적 접근 소재로 이용한다는 기조를 법원행정처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편, 조사단은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법관들에 대한 성향, 동향, 재산관계 등을 파악한 파일이 존재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한 법원행정처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 판결을 분석한 보고서를 상고심을 맡은 대법원의 연구관에게 건넨 것으로 확인됐고, 박근혜 정부 시절 대법원의 통상임금 판결과 관련해 ‘BH(청와대)가 흡족해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작성했다는 의혹도 일부 사실로 확인됐다. 또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인 판사들의 징계를 추진하려 한 정황도 파악됐다. 이런 사법부의 패악행위(悖惡行爲)에 관한 보도를 접한 국민들은 그야말로 아연실색이다. 대한민국이 과연 ‘민주공화국’인지조차 심히 의심스러워진다.

 종래 법관들은 외부의 비판을 받을 때마다 ‘사법권 독립’을 침해한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구속영장 기각에 대해 검찰이 반발한 때에도, 삼성 등 재벌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에 대해 비판 여론이 인 때에도 법원은 사법권 독립을 ‘방패막이’로 활용했다. 그런데, 정작 사법권 독립은 외부의 자가 아닌 사법부 자신(구성원)에 의해 처절하게 침해·유린됐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체계적 인사상 불이익을 부과한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상 조치도 없을 것이라 하니 매우 실망스럽다.

 법관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공부 잘 한 사람들’이다. 두터운 법률 서적을 수십 번씩 읽고 암기해 어려운 사법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우수 인재들이 국민의 기대와 아픔을 외면한 채 비열하게 정치권력의 비위를 맞추고 아부했다는 사실에 국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다. 사실 법원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도 ‘권력의 시녀’ 역할을 했던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법원이 제대로 공정한 판결을 했더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역사의 퇴보를 초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티즌들은 인터넷상에서 법관들을 ‘가장 뿌리 깊은 적폐세력’이라 지칭하며 법관을 차라리 외국에서 수입하자는 조롱 섞인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나락에 떨어진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려면, 법관들은 이런 참담한 처지에 처하게 된 것을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하고, 지성인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해 뼈를 깎는 자기 쇄신을 해야 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관련 책임자들에 대한 수사를 의뢰해 철저히 진실을 밝히고, 신성한 법을 ‘능욕’하는 ‘사법행위(邪法行爲)’를 자행한 것이 사실이라면 법적 책임을 엄혹하게 물어야 한다. 재판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비할 데 없는 중대한 국기 문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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