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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실내건축과 교수
목조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일본의 근세도시는 작은 불씨 하나로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곤 했다. 1657년 도쿄에서 발생한 화재는 10만7천46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초대형 화재였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를 계기로 소방체제를 정비하고 도시 곳곳에 방화시설을 설치했다. 화재감시탑 설치가 의무화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적군의 침입을 감시하던 망루를 본 딴 화재감시탑은 목재로 만들기 시작해 철탑으로 바뀌고, 나중에는 소방서 건물의 일부로 세워지면서 철근 콘크리트조도 등장한다. 탑 꼭대기에는 감시자가 머무는 공간과 경보용 종이 달려 있었고, 명칭은 주로 화견로(火見櫓)로 불렸지만, 화견대(火見臺), 망루, 망대, 불종대 등 다양했다.

 근대 개항기 인천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본국의 제도에 따라 소방대를 조직했다. 당시 소방대원의 역할은 불을 끄는 것과 함께 화재가 다른 동네로 번지지 않도록 건물을 철거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민간소방대원의 주축은 건물을 짓는 목수들이었다.

 1884년에 조직된 민간소방대를 필두로 1889년 12월에는 규칙을 개정하고 소방대원 수를 늘렸다. 1896년 7월에는 민간조직을 공설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화재에 대비했지만, 1907년에서 1910년까지 800여 채의 건물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대형화재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자 이사청은 본격적인 소방설비를 갖춰 나간다. 1907년 증기펌프를 도입하고, 소방용 저수조와 화재 감시용 망루를 설치했다.

 소방용 저수조는 인천시 중구청 안, 신포시장 옆, 외환은행 앞 등 세 곳에 만들어진다. 중구청 안에 설치된 저수조는 몇 년 전 중구청 정비사업 중 땅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됐다. 돌을 쌓아 벽체를 구성하고 그 위에 돌을 덮어 만든 이 저수조는 지금도 중부소방서가 관할하는 비상용 저수조라는 사실이 알려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910년에 세워진 근대 소방관서인 인천상비소방소는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정문 자리에 있었다. 1층에 소방차 대기 공간을 두는 등 지금과 비슷한 모양의 2층 건물이었고, 건물 뒤편 언덕 위에는 높이 7.8m(면적 3.3㎡) 규모의 화재감시탑이 설치됐다. 1919년 4월 전동소방파출소와 같이 만들어진 화재감시탑은 높이 13.8m(면적 13.2㎡)로 규모가 제법 큰 편이었고, 사이렌과 함께 전화기도 가설돼 있었다.

 일본인 거주지역에는 이와 같은 소방시설이 세워진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던 동네는 소방 사각지대로 남아있었다. 1913년에 이르러서야 조선인 사업가들이 기금을 모아 경동 87번지에 상비파견소를 만들었다. 여전히 많은 곳이 화재에 노출돼 있었던 조선인 마을에는 증기 기관차에서 떨어진 불씨가 초가지붕으로 번지는 등 화재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인천에 소방서가 들어선 지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소방시스템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새로운 유형의 화재가 일어나고 있어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올 봄에 발생한 인천항 선박화재와 가좌동 화학공장 화재는 일반적인 화재가 아니라 진압에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엄청난 양의 검은 연기로 시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지만, 두 사건 모두 소방관서의 과학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으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물인터넷 기술을 이용한 실시간 감시가 이뤄지고 지능형 로봇들이 인명을 탐지하는 세상이다. 화재예방과 소방에 머물러 있던 소방서의 업무도 인명구조와 구급은 물론 생활안전까지 확대돼 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소방시스템도 시민의 관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 역할을 다할 수 없다. 구조물로서의 화견대는 사라졌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안전 의식이라는 화견대 하나를 두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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