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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환 정경부장
느지막이 눈을 뜬 아침에 문뜩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지난주 휴가랍시고 빈둥대며 게으름을 피우는 내 꼬락서니가 영 못마땅한 참이기도 했다. "그래 무작정 나가보자." 걷기에 편한 운동화를 신고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머릿속이 하얬다.

 "어딜 가지?" 막상 갈 데가 떠오르지 않았다. 머뭇거리기를 채 1분도 안 돼 집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쯔쯧’ 혀를 차 잇새로 소리를 내며 스스로의 한심함을 삭였다. 책장을 향해 흐리멍텅한 눈을 치켜 올리는 순간 흰 바탕 표지의 책 한권이 들어왔다. 역사소설 「사도세자의 고백」이었다.

 "옳지, 그거였어!" 소설 속 장소에 서보기로 작정했다. 250여 년 전 거칠었던 그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기도 했다. 적자로 폐선 신청까지 했던 1천 번대 광역버스를 타고 냉큼 서울로 향했다. 서울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창덕궁이었다. 아버지 영조와 부인 혜경궁 홍씨, 사도세자의 자취가 묻어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던가. 평일인데도 한복차림의 일본인 단체관광객과 배낭을 짊어진 미국인 자유여행객들은 궁을 배경으로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느라 법석였다.

 꼴에 책 한권 읽었다고 같잖게 진지한 표정으로 세월의 더께를 천천히 읽어내려고 애쓰는 내 자신이 쑥스럽기도 했다. 인정전(仁政殿) 앞에선 두 살짜리 원량 사도의 세자 책봉식을 그려보고, 후원에서는 북벌을 꿈꾸며 무예를 닦았던 젊은 사도의 모습도 떠올렸다. 창경궁 문정전(文政殿) 앞에선 8일 동안 뒤주에 갇혀 죽어간 사도의 비극을 어림진작 회상했다.

 별안간 소설 속 문장이 생각났다. ‘망국동(亡國洞)에 망정승(亡政丞)이 산다네.’ 망국동은 창덕궁 옆 안국동을 뜻했고, 망정승은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 홍씨의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가리켰다. 요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홍봉한 일가를 비난하는 동 세간의 풍자였다. 노론인 홍봉한에게 소론인 사도세자는 정적이었고, 사위가 뒤주에 갇혀 죽어갈 때 그 장인은 시치미를 떼며 침묵했다.

 "이왕이면 권문세도가들이 살았다는 동네 안국동(북촌)도 둘러보자." 북촌에 꽂혀 유람 4시간 만에 창덕궁과 창경궁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북촌으로 가기 전 낙원상가 인근 익선동(益善洞) 한옥골목을 잠깐 거치기로 했다. 이곳에는 1920년대 서민 개량한옥 100여 채가 옹기종기 몰려있다. 젊은이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덧칠해져 안을 새로 꾸민 카페와 수제맥줏집, 만홧가게 등으로 골목마다 촘촘했다. 거리 바닥 이정표 ‘다다익선(多多益善)’처럼 골목에는 사람들로, 맛과 멋으로 색을 입힌 가게에는 즐길 거리로 왁자지껄했다.

 높은 벼슬에 권세가 있는 집안들이 살았던 북촌은 익선동의 한옥골목과 달리 꽤 괜찮은 모양의 한옥들로 고즈넉했다. 터덜터덜 걸으며 한옥마을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어서 간 곳은 길 건너 인사동(仁寺洞)이었다. 골동품 가게를 기웃거리고 도예 갤러리와 화랑에서 요것저것 눈요기하다 보니 벌써 해가 졌다.

 "내친 김에 청계관광특구도 구경하자." 빌딩 숲 사이로 난 물길은 힐링의 길이었다. 자동차 소음과 인파에서 비켜나 시내 한복판에서 풀냄새를 맡고 물소리를 들으며 걸었던 두어 시간은 희열과 감동의 짬이었다. 천(川)도 이렇게 변신해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구나!

 지하철에 몸을 싣고 인천으로 오는 내내 번민이 끊이지 않았다. "인천도 남들이 못 가진 개항장문화지구나 차이나타운, 월미관광특구가 있는데, 고려 몽고항쟁기 39년 수도였던 강화도도 있지 않은가. 얘깃거리로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원도심이 수두룩하건만, 인천도 도심 한복판에 물길이 조성됐는데… 나는 왜 생뚱맞게 서울 종로에 가서 하루 종일 놀았지?"

 분명한 건 사람을 홀릴 수 있는 물적 자원의 부족이 아니다. 일을 벌이고 결과를 만들어 내는 열정과 도전, 내가 모자라면 다른 사람의 머리라도 빌리겠다는 용인술의 부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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