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평가할 때 말이 많다거나 말이 없다는 식의 잣대가 자주 오간다. 말이 많은 것도 말이 적은 것도 사회생활을 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해야 할 때, 자신의 의사를 반드시 표시해야 할 때 과연 입을 여느냐의 여부다.

 그래서 부모들은 어려서부터 자식들이 남들 앞에서 자신의 의사를 ‘똑 부러지게’ 표현하는 녀석이 되기를 원한다. 회사 경영진 역시 직원들이 회사 발전과 단합을 위해서라면 달든 쓰든 어떤 말을 자주 뱉어 주기를 바란다.

 신문사의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신문의 기사가 차고 넘치든 소박하고 빈약하든 그 양(量)을 떠나 신문사의 의사가 시의적절하게 나와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 의사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기자에 의해서 또 부장·부국장이 속한 데스크진에서 혹은 신문사 기조 채택의 정점에 있는 편집국장과 주필 등에 의해 드러난다. 그런데 예로부터 사회적 공기(公器)로 불리는 언론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판단을 받을 때가 많다.

 언론의 불공정은 어떻게 드러날까.

 독자들이 가장 쉽게 언론의 불공정성을 피부로 느끼는 대목은 ‘선택적 정의(正義)’, 혹은 ‘선택적 함구(緘口)’에 있다. 선택적 정의는 사적인 관계나 친분, 기타 외부에 밝힐 수 없는 저간의 사정 때문에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사안에 대해 한 쪽만 정의롭고 다른 한 쪽은 부정(不正)하다고 언론이 공표하는 방식이다.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쯤 되겠다. 하지만 선택적 정의보다 독자들이 언론을 지독히도 불신하고 깎아 내리는 요소는 선택적 함구에 있다.

 선택적 함구는 언어 표현의 능력에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말을 하는 것이 기대되는 특정한 상황에서 말을 하지도 어떤 반응을 내놓지도 않는 것이다. 이는 본 것을 못 본 척, 들을 것을 못 들은 척,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마냥 그냥 고개를 돌려 버리는 일이다. 선택적 함구야말로 한 언론사의 공정성을 판단해 볼 수 있는 잣대일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바로미터(氣壓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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