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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선승들의 일화를 읽다보면, 평범한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의 이면에는 분명히 큰 가르침이 숨어 있겠지요. 그리고 그 가르침을 찾느냐, 찾지 못하느냐는 순전히 저의 몫일 겁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많은 초보 스님들이 큰스님이 계신 절에 모였습니다. 스님들이 많은 탓에 ‘동당’과 ‘서당’이라고 불리는 두 방에 나뉘어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동당과 서당의 스님들이 사사건건 대립하고 으르렁대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숙소만 다를 뿐 다른 모든 것은 같았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 한쪽 방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다른 쪽 방의 스님 때문에 다리를 다쳤습니다. 이를 두고 두 집단의 갈등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알게 된 큰스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공부하겠다고 찾아온 제자들이 공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에 집착하고 있고, 게다가 편까지 갈라 다투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을 테니까요.

 큰스님이 고양이를 한 손에 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너희가 이 고양이에 대해 한 마디라도 말을 할 수 있으면 이 고양이를 살려주겠지만, 만약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고양이를 당장 베어버릴 것이다."

 제가 제자라고 상상해보았습니다.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수행과정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행복의 지혜를 찾고자 이 험한 산속에 들어왔는데, 고작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내가 잘했다’, ‘네가 잘못했다’, 라며 싸우고 있는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이렇게 본질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큰스님은 가르침을 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불쌍한 고양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비통함으로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본질’을 망각하면 사소한 일로 인한 자존심 싸움에 집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 폐해는 ‘나’와 ‘너’뿐만 아니라 그 다툼과 무관한 사람들에게까지 커다란 상처로 이어집니다.

 온갖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다툼들을 보면, 명분은 그럴 듯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개인이나 집단의 ‘탐욕’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본질이 왜곡된 이런 다툼의 결과가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고통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툼이 아니라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정채봉 시인의 「나는 너다」에 나오는 동화에서 그 답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 여섯 식구인데도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옆집은 자녀 둘을 가진 네 식구만 사는데도 큰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옆집 아저씨가 ‘오순도순’네 집을 찾아와 화목함의 비결을 묻자 이렇게 답했습니다. "댁은 똑똑한 사람들만 살고 있기 때문에 말썽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희 집은 좀 부족한 듯한 사람들만 모여 살기 때문에 조용하죠. 우리 집은 누가 그릇을 부주의로 깨뜨려도 깬 사람은 물론 곁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다 자기 잘못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모두 자기 탓이라고 뉘우치며 사니까 화목할 수밖에요."

 정채봉 시인의 혜안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내 탓’과 ‘네 탓’이 조화와 분열을 결정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다툼의 원인에는 ‘네 탓’, 즉 ‘나는 옳은데 너는 틀렸다’는 교만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에 온 목적이 ‘공부하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동당과 서당에서 공부한다는 이유만으로 편을 가르고 다투는 바람에 공부를 내동댕이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행복의 비결은 ‘내 탓’에서 출발합니다. 다툼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을 때 비로소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성장할 겁니다. 그리고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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