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밑 이랑진 비탈 마을에는 ‘헤어짐’이 서럽게 배어 있다. 그 멀어짐은 영원한 격절(隔絶)이 아니다. 재회(再會)를 기약한 순간의 석별(惜別)이다. 그래서 그곳의 만남은 더욱 간절하고도 애틋하다. 그곳에서의 조우(遭遇)는 새롭게 나고 자라는 생성(生成)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인천시 남동구 만부로 7번길 만부마을에는 이별과 만남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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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시 남동구 만부마을 전경. 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남동구 간석동 인근 만월산에서 만수2동 광학산(일명 금마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6㎞, 폭 3㎞ 산자락 오래된 마을들은 개발의 세풍(世風)에 밀려난 가난한 자들의 공간이었다. 기름진 삶을 곁눈질조차 할 수 없던 남루한 생애들의 앙상한 삶의 터였다. 차마 송곳 꽂을 땅조차 가질 수 없던 자들이 모여 하루하루를 겨우 견디며 살아가는 만수동 만월산 터널 입구 벽산과 향촌마을이 그러했고, 유신과 만부마을이 그랬다.

 벽산마을은 1990년 이전만 해도 중국인 전용묘지가 있던 곳이다.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던 중국인 묘를 옮긴 곳이다. 1958년 도화동 중국인 전용묘지가 인천대학 부지로 낙점됐다. 인천시는 선인재단 측에 도화동 묘터를 넘겼다. 대신 무상으로 만수동 산6 일대 국유지 17만9천500㎡를 중국인 묘터로 내줬다. 이 과정에서 화교와 선인재단이 치열한 법적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묘지는 2천872기에 달했다. 그러다가 도시 확장으로 만수동 중국인 전용묘지는 부평가족공원으로 이장해 안치됐다. 지금의 벽산아파트가 들어선 자리가 중국인 전용 묘터다.

 만월산 기슭의 마을이 그렇듯 만부마을의 사연도 깊다. 만부마을의 옆 뒷산의 이름이 ‘물넘이 뒷산’이다. 광학산 자락 너머 인천대공원 인근 거마산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수도권외곽순환도로 8차로 일대 길목을 ‘무네미 고개, 수현(水峴) 마을’로 부른다.

 조선 중종 때 문신 김안로는 굴포천을 잇는 물길을 내서 내륙운송 체계인 운하 건설을 시도했다. 현재 인천교통공사 인근 언덕배기 ‘원통이 고개’ 뚫기 공사를 벌였으나 암반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구 효성동 일대 안하지 고개도 파기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무네미 고개도 도전했으나 땅 밑 바위로 고배를 마셨다. ‘무네미(水峴)’라는 이름만 있을 뿐 물길이 없는 이유다.

 만부마을 뒤쪽으로 ‘비리 고개’가 있다. 만수2동 신동아아파트에서 부평구 일신동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이 고개는 옛날 한양에서 고개를 넘어 황해 바다로 통하는 길목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한쪽 길은 오달기 주막거리(구월초등학교)~황토꼬지(시청 부근)~관교동~문학동을 거쳐 사모지 고개(三呼峴)를 넘어 능허대로 이어진다.

 이 고개는 그 옛날 중국 무역선이 닿았던 수산동 포구에 이르는 길목이었다. 서울서 험난한 먼 뱃길을 떠나는 이를 배웅 나온 가족들과 친지가 이곳에서 작별을 하는 ‘별리 고개(別離峴)’라고 부르던 것이 ‘비루 고개’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또 별리 고개가 밤하늘에 떠있는 ‘별’로 변해 한자로 ‘성현(星峴)’이라 잘못 변형돼 부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옛 고구려 시조 동명왕이 죽자 온조와 비류 형제가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삼각산에 올랐는데, 온조는 한산에 도읍을 정하고, 비류는 온조와 헤어져 미추홀에 나라를 세울 때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해서 ‘비류 고개’라 한 것이 역시 ‘비리 고개’로 변했다는 견해도 있다.

 만부마을 주변은 인천중학교·제물포고등학교 교장으로 인천 교육계의 전설인 고(故) 길영희(吉瑛羲·1900∼1984)선생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일명 ‘돌대가리 교장’이었던 길 선생은 우리나라 유일의 무감독 시험을 교실에서 펼쳤다. 1960년 교장으로 있을 당시 지방 고등학교로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서울대 전체 수석 입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길 선생이 남동구 만수2동과 인연을 맺게 된 때는 1938년이었다. 그곳에 땅 수만㎡를 사들여 ‘후생농장’을 조성하면서부터이다. 이름은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이용후생(利用厚生)’에서 따왔다. 연암은 대중의 자유로운 생산·소비활동을 통한 상공업의 장려와 도시 개조를 주창했다. 길 선생도 만수2동에 후생농장을 세워서 말 그대로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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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선생의 후생농장 건설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에게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 ‘산과 강이 있고 지미(地味)가 비옥한 지점을 택하여서 200가구 정도의 집단 부락을 세우는 것.’ 그것이 도산의 이상촌이었다.

 길 선생이 이상촌 후보지를 마련한 곳이 남동구 만수2동이었다. 지금의 삼부아파트 언저리이다. 선생은 이곳에서 교장이 되기 전 6년간 농부로 지내면서 청년들을 상대로 강습회를 여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만부마을의 생성은 도시 팽창이 기폭제였다.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경인지구 특정개발계획’이 밑바탕이 됐다.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40여만 명에 불과하던 인천 인구는 1969년에는 57만여 명을 돌파했다. 이때 인천시 남동구 만부마을도 탄생한다. 1960년대 이후 이곳은 철거민들이 집단 이주한 무허가 정착지가 된다. 급격한 도시개발 속에 밀려난 이들은 살 곳을 찾아 외곽으로 밀려났고, 1972년 신시가지 개발에 쫓긴 철거민들은 산을 깎아 33㎡씩 토지를 불하받아 정착한다.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모인 만부마을은 ‘소외된 마을’이 되고 말았다. 주민들은 낮은 수준의 주거환경과 더불어 한동안 탈출구를 찾지 못했다. ‘지역 발전’이란 거대한 태양 아래 만부마을은 그늘진 음지가 되고 말았다. 만부마을의 모습은 1980년대부터 갖춰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주공아파트와 빌라가 지어졌고, 조각조각 났던 필지도 일부 합쳐진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당시 만부마을을 비롯해 간석과 향촌, 유신 등 총 4곳의 집단 이주지가 있었다. 하지만 간석과 향촌 등은 주택정비사업으로 전면 철거를 통한 공동주택단지가 조성되면서 마을이 완전히 변했다.

 예전 모습을 간직한 만부마을은 일부 합필지를 제외하면 다수가 26~40㎡의 협소한 단위 필지로 돼 있는 상태였다. 도로나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이 부족했다. 철거민이 대다수였던 주민들은 일용직 노동자와 실업자 등으로 바뀌어 여전히 도시의 경제빈곤층이 다수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그늘은 걷힐 줄 몰랐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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