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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삼일절입니다. 어린 시절, 이날이 가까이 오면 ‘기미년 3월 1일~’로 시작되는 노래를 부르며 유관순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컸습니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그녀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참으로 가슴이 저렸습니다. 열일곱 소녀의 눈앞에서 일본 헌병의 손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아야만 했고, 소녀 또한 징역살이와 함께 모진 고문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현실이 지금으로서는 참으로 상상하기조차 끔찍합니다. 그녀가 남긴 유언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날의 고통을 되새기고 그런 고통의 역사가 다시는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기에 충분합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역사는 과거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해석’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현재’의 우리들 몫입니다. 과거의 쓰라린 고통을 어떻게 의미 있게 승화시킬 수 있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곤 합니다. 돼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기껏해야 목을 45도밖에 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돼지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있다고 하는데, 바로 ‘넘어졌을’ 때입니다. 넘어져서 아프기는 하지만 그 대신 새로운 세상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복잡한 삶의 단순한 이치가 아닐까요. 아픈 과거가 ‘넘어진’ 것이라면 그 아픔에서 소중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채봉 시인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산문집에 ‘광야로 내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다’는 멋진 은유가 나옵니다. 최운규 선생의 「물속의 물고기도 목이 마르다」에도 고통이 주는 의미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글이 있습니다. "오물 한 방울이 물 컵 속에 떨어지면 물 컵의 물은 못쓴다. 그러나 같은 오물이라도 바다에 떨어지면 아무렇지도 않다. 고난과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이 왔는가? 그러면 싸워 이기려고 하다가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마라. 내가 먼저 성장하면 된다. 고난보다 내가 커지면 된다."

 "생쥐에게 1㎝의 상처는 생명을 위협하지만, 코끼리에겐 아무런 느낌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니 스스로 자신을 작게 여기고 열등감에 빠지지 마라. 시험의 크기는 누구에게나 비슷한데, 내가 작아지니까 문제가 커 보일 뿐이다."

 그렇습니다. 역사의 아픔을 수없이 겪은 우리가 그 아픔의 늪에 빠져 서로를 헐뜯으며 분노와 원망 속에서 허우적거릴 게 아니라, 오히려 코끼리처럼 힘을 기르는데 모두의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호승 시인은 「울지 말고 꽃을 보라」에서 말합니다. "거실 한쪽 끝에서 모과가 썩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상하다. 썩어가는 내게서 참 좋은 향기가 난다는 거다. 뜻밖이다. 그때 문득 아빠의 말씀이 떠오른다. ‘얘야, 실패를 너무 두려워 말아라. 실패에는 성공의 향기가 난단다.’"

 고통이 훗날 좋은 향내와 튼실한 열매를 맺게 하는 힘으로 작용될 때 고통의 의미를 제대로 찾아낸 겁니다. 「언어의 온도」라는 책에 시내버스 안에서 약봉지를 든 할머니와 어린 손자가 나누는 대화가 나옵니다.

 "얘야, 아직도 열이 있구나. 저녁 먹고 약 먹자."

 "네. 근데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맞습니다. 아파 봐야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픔을 딛고 극복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더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유언이 다시금 아른거립니다. 소녀의 아픔과 소녀의 절규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쥐가 아닌 코끼리로 살아갈 수 있는 지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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