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신.jpg
▲ 이선신 농협대학교 부총장
우리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근로자에게 할증임금(연장·야간·휴일근로에 대한 가산임금)을 지급할 때에는 통상임금을 기초로 산정하도록 하고 있는데, 통상임금의 개념과 산정 방법에 관한 사항을 매우 불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1953년에 제정된 근로기준법은 일본의 노동기준법을 모델로 삼아 만든 법인데, 통상임금에 관한 내용을 일본 노동기준법의 내용과 일부 상이하게 규정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할증임금의 산정기초에서 제외되는 임금항목을 하위법령에서 명확히 열거해 정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임금 항목이 통상임금 산정 시 포함되는지 여부를 법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됐다. 주무관청인 노동부에서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행정지도해 왔으나, 일관성이 없거나 판례와 다른 경우도 있었다. 법원마저도 특정 임금항목(정기상여금, 중식대, 가족수당 등)이 통상임금 산정기초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대해 오락가락하는 판결을 내린 경우가 자주 있었다.

 마침내 대법원은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과 혼선이 있었던 통상임금 개념과 요건에 관해 구체적이고 명확한 법적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근로 현장에서 통상임금 산정과 관련된 분쟁 소지를 없애고자 2013년 12월 18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판결 내용은 비판 소지가 많았다. 특히 "신의칙(信義則)에 따라 추가로 임금 지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에 대해서는 "타당하지 않다", "신의칙 적용의 기준이 너무 불명확하다"는 등의 비판이 제기됐으며, 통상임금에 대한 법적 논란은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달 22일 서울고등법원 민사1부(윤승은 부장판사)는 기아자동차 노조 소속 2만7천여 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 청구 소송에서 1심과 같이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이 주목 받은 이유는 청구금액이 1조 원에 달하는 거액이라는 점도 있지만, 법원이 과연 "신의칙을 적용해 추가로 임금 지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아자동차 측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에 쏠렸다. 항소심은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는 "신의칙의 적용은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향후 관련 소송에 대해서도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행정부의 행정지도를 성실하게 믿고 따라온 기업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또한 오락가락하는 사법부의 판결에 대해서도 큰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을 조성한 근본 원인 제공은 통상임금에 관한 법규정을 ‘불명확하게’ 만든 입법부에 있다. 법을 처음 만들 때 일본법의 내용과 똑같이 규정하기만 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통상임금 관련 법적 혼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일본에서는 통상임금 관련 소송이 많지 않다). 지금이라도 일본처럼 할증임금 산정기초에서 제외되는 임금 항목을 시행령에서 명확히 열거해 정하자는 입법 의견이 제시돼 있지만, 국회는 정쟁만 지속할 뿐 아직도 법 개정을 미루고 있다. 수백만 원 내지 1조 원에 달하는 추가적 임금 지급 부담을 지게 된 기업에게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불명확한 법규정에 따른 리스크를 온전히 기업이 떠안게 된 상황이다.

 기업으로서는 법을 잘못 만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도 있을 터인데, 만일 그 청구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국가배상금이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지급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입법부의 무사안일, 무능과 나태가 국민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규제 완화’를 거론하곤 한다. 그러나 ‘규제 완화’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규제 명확화’만 실천하더라도 기업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불명확한 법규정은 기업에게 소송 빈발에 따른 막대한 리스크를 가중하게 되고, 돈 벌 호재를 만난 변호사들만 웃음지며 춤추게 할 뿐이다. 입법을 할 때에는 최대한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강한 규제’보다 ‘불명확한 규제’가 더 큰 리스크를 초래한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