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독립의 열망 女風으로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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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의 열망 女風으로 휘몰아쳤다
2. 3·1운동과 여성 독립운동가들
  • 박종대 기자
  • 승인 2019.03.18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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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여성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담은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항거:유관순 이야기’다. 당시 꽃다운 나이인 열일곱 살의 유관순은 고향인 충남 병천에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영화는 이곳에 갇힌 유관순이 감옥 안에서 만난 여성들과 멈추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나간 모습을 그렸다.

 이처럼 일제 치하에서 여성의 독립운동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여성들은 독립운동의 주체자로서 일제 침탈에 맞서 싸웠다. 경기도에서도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약이 치열하게 펼쳐졌다. <편집자 주>

▲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기생들.
# 경기도 출신 여성들의 독립운동

 도내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발생한 지역은 개성이다. 개성은 당시 경기도에 속해 있었지만 광복 이후 한국전쟁으로 남북 분단이 이뤄지면서 황해도로 편입됐다.

 일제 때 우리나라 수도였던 경성과 같은 날짜인 3월 1일에 개성에서도 한영서원의 학생과 목사에 의해 준비됐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경찰의 감시로 시위는 끝내 좌절됐다.

 이후 3월 3일 호수돈여학교와 송도고보의 학생들이 배턴을 이어받아 일반 군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진행한다. 경기도에서 최초로 이뤄진 시위로, 이를 시작으로 도내 전역으로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여성들의 시위에서 경기도 3·1운동이 출발했다는 점이다.

 이 외에도 파주와 강화·김포·수원 등지에서도 여성들의 주도로 잇따른 시위가 열렸다. 1920년 배화여고보 학생들이 주도한 3·1운동 1주년 기념시위에서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경기도 출신의 여학생들이었다.

 경기도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는 주로 개성과 파주·강화·김포·수원·경성·전주 등지에서 활동했다. 경기도 출신으로 다른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는 전주에서 주로 활동한 고양 출신의 박순애, 경성에서 활동한 가평의 최란, 연천의 소은숙·소은명, 포천의 안희경·김마리아·안옥자, 시흥의 박양순 등이 있다.

▲ 삼일여학교 출신의 민족운동가 나혜석, 사회주의 여성 혁명가 이현경
 수원 출신으로 국내외를 걸쳐 활동한 차인재, 사회주의 여성 혁명가 이현경, 수원여자잠업강습소 출신 의열단원 최복동, 삼일여학교 출신의 민족운동가 나혜석, 박충애, 임순남, 최문순 등이 있다.

 이들의 활약상은 내용에 따라 몇 갈래로 나뉜다. 먼저 민족대표 33인과 연계해 개성에서 주로 3·1운동을 펼쳤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오화영은 개성 북부예배당 강조원에게 독립선언서 200장을 개성에 배포하도록 요청했다.

 이에 강조원은 호수돈여학교의 서기 신공량에게 이를 배포해 줄 것을 부탁했고, 신공량은 호수돈여학교 부속 유치원 교사 권애라를 통해 어윤희, 신관빈에게 전달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3월 3일 개성의 만월정과 동본정, 북본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부부 만세운동을 벌인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3월 10일 파주에서 구세군 부교인 임명애가 교하리 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 100여 명과 함께 이 지역 최초의 시위를 열었다.

 같은 달 25일에는 자신의 남편이자 구세군 정교인 염규호 등과 함께 자택에서 남편이 작성한 격문 60여 장을 인쇄해 배포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임명애는 징역 1년6개월, 염규호 등은 징역 1년을 받았다. 투옥 당시 만삭이었던 임명애는 임시 출소해 출산한 뒤 재수감되기도 했다.

 수원에서 여성들의 독립운동도 활발히 전개됐다. 일제강점기 시절 수원경찰서와 자혜의원 앞은 일본의 폭압통치를 상징하는 공간이자 전통 예기(藝妓)의 자존심을 짓밟는 장소였다.

 이에 수원예기조합의 기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주도한 기생 김향화는 3월 29일 이곳에서 동료 기생 30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다. 이로 인해 김향화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 삼일여학교 전경.
# 만세운동과 기생

 우리나라에는 전통적으로 기생제도가 존재했다. 조선사회 신분제 틀 안에서 천민 신분을 지녔지만 궁궐과 관청에 소속된 관기로서 양반 지배층을 위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예술적 재능을 비롯해 학문도 겸비했다. 이러한 기생들도 일제 때 민중의 일원으로서 만세운동에 동참한다.

 3월 29일 수원기생 33명이 건강검사를 받으러 가면서 자혜의원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기생들이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벌인 것은 수원이 최초였다. 이들의 만세가 진행된 후 야간에는 상인과 노동자 등이 합세해 지역 곳곳에서 만세를 불렀고, 일본인 상점의 창유리를 부수는 등 시위도 격렬해졌다.

 이 중심에는 수원예기조합의 김향화가 있다. 당시 김향화는 스물셋의 나이로 조합 이사를 맡을 정도로 내부에서 인정받는 기생이었다. 그는 이날 가장 선두에서 기생들을 이끌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자혜의원은 화성행궁의 정전 건물이었던 봉수당이 세워져 있던 자리다. 화성행궁은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옮긴 뒤 팔달산 밑을 새로운 고을을 지을 터로 정하면서 세워진 곳이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른 적도 있는데, 궁중 관기를 비롯해 지방 관기들도 참여했다. 이러한 연유에서 화성행궁은 수원기생들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 공간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화성행궁에 병원을 만들어 놓고 기생들에게 치욕스럽게 성병검사를 받도록 강요했다.

▲ 국내외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한 차인재(사진 앞열 왼쪽)
 기생들의 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된 김향화는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 수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10월 27일 출소한 김향화는 이후 서울에서 살다가 1950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3월 31일에는 안성에서도 기생들의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안성조합의 기생 일동이 오후 4시께 만세운동을 시작하자 안성 곳곳에서 군중 1천여 명이 연합시위를 일으켜 군청과 면사무소, 경찰서에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산상시위도 함께 전개됐는데, 오후 6시께 해산했다가 오후 7시 30분께 다시 시작돼 3천여 명이 횃불을 들고 시위에 동참하자 면장이 보통학교에 군중들을 모아 놓고 간신히 회유한 끝에 해산시킨 적도 있었다.

 수원기생 33인의 만세운동을 연구한 이동근 수원시박물관 학예사는 "수원기생을 대표하는 김향화는 독립운동 조력자가 아닌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의로운 기생’이자 ‘독립운동가’였다"며 "일제가 만든 왜곡된 이미지의 기생을 새롭게 평가하고 그들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종현 기자 qwg@kihoilbo.co.kr

사진=수원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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