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진개’ 시절부터 머물러 온 정겨운 이곳에 발길 멈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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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개’ 시절부터 머물러 온 정겨운 이곳에 발길 멈추다
신포동 ‘성광방앗간’
  • 김유리 인턴기자
  • 승인 2019.03.29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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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복 성광떡방 사장이 지난 25일 인천시 중구 신포국제시장에 자리한 떡방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천 신포국제시장의 골목에 있는 노포(老鋪) 성광방앗간 안에는 1956년 개업 당시에 만들어진 간판이 하나 있다. 창업주였던 이건석 사장은 1947년 신포시장 인근에서 성광방앗간을 시작했다. 창업 당시에는 백설기·인절미 등의 떡과 함께 고춧가루, 기름도 함께 파는 전형적인 방앗간이었다. 그 후 1956년 음식 판매를 위한 정식 허가를 받고 현재 가게 자리로 옮겨와 떡집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개업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판에는 신포동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귀한 말이 적혀 있었다. 바로 ‘터진개’다.

 신포동의 옛 이름 ‘터진 개’를 들어본 적 있는가. 지금은 인천항 개항을 위해 매립돼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원래 이 일대는 ‘트여 있는 갯벌’을 바라보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구한말 다소면 선창리에 속해 있다가 1903년 부내면이 만들어질 때 ‘새로 번창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창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신창동은 1930년대 들어 ‘터진 개’를 일본식 한자로 바꾼 신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광복 뒤 1946년 신포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는데,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새롭게 발전하는 포구라는 뜻이다.


 1988년 창업주 이건석 사장이 타계하고, 이 사장의 막내아들인 이종복(58)사장이 가업을 잇고 있다.

 이종복 사장은 목조 건물과 합판 집들이 즐비했던 신포국제시장의 과거를 회상했다. "지금 닭강정을 파는 골목에는 예전에 화교들이 차린 점포가 굉장히 많았어요. 우리 어릴 때만 해도 한국 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용하게 살아가던 일본 사람들도 많았죠. 지금 횟집골목이 있는 쪽이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에요."

 터진개 신포국제시장은 과거 우리나라에 화장품, 양장 등 외국 문물이 처음 들어온 신문물의 전시장이었다. 어시장과 채소시장으로 출발해 1927년 공설 제1일용품시장과 공설 제2일용품시장이 됐다가 광복 이후 지금의 전통시장을 유지하고 있다. 성광방앗간 근처 쉼터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중국인이 개설한 푸성귀전을 형상화한 조각물이 놓여 있다. 각 나라의 외국인들이 내항을 통해 들어와 정치·문화·경제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 이종복 사장이 자신이 직접 만든 떡방 간판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현재 가게 바깥쪽에 걸려 있는 간판은 이종복 사장이 직접 만든 것이다. 과거 화성횟집이라는 신포국제시장의 유명한 민어집이 가게를 접으며 기증한 도마에 직접 조각을 새겼다고 한다. 각각 떡을 의미하는 우리말, 한자, 영어, 일본어가 적혀 있다. 신포국제시장이 관광지로 입소문을 타자 멀리서 찾아오는 외국인 손님들도 있어 솜씨를 발휘했다. 과거 인천의 입구 역할을 했던 터진 개의 명성은 성광방앗간에선 현재 진행형인 듯하다.

 1947년부터 72년 동안 이어진 성광방앗간이지만 한때는 외환위기(IMF 관리체제)의 풍파를 극복하지 못하고 도산 위기에 처해진 시절도 있었다. 떡을 대량 납품하던 웨딩홀 등의 거래처들이 계약금을 받을 틈도 없이 줄도산한 것이다. 이후 이종복 사장은 가게 운영 시스템을 소매로 전환하고 떡의 메뉴를 개선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시절부터 꾸준히 찾아주는 단골손님 덕분에 그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그는 "과거 어른들은 약식 같은 건강에 좋은 떡을 선호하고 많은 양을 한꺼번에 사 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요즘 젊은 층은 인절미나 꿀떡처럼 달콤한 것을 좋아하고 적은 양을 사 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냉장 보관이 가능한 것을 선호한다"며 "우리나라의 떡은 세시풍속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생일에도, 결혼할 때도, 초상 났을 때도 평생에 걸쳐 떡을 먹지 않는가. 시대와 연령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이 찾는 떡의 종류도 자연스럽게 달라지는 걸 캐치하면 흥미롭다"고 전했다.

 가격과 품질은 일정하게 유지하면서도 그의 말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맞춤형 떡을 만드는 것이 성광방앗간이 꾸준하게 버틸 수 있는 전략이다.

▲ 손님맞이에 한창인 이종복 사장.
 성광방앗간에는 독특한 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무인 판매다. 이종복 사장은 오후가 되면 곧잘 오토바이를 몰고 제법 먼 거리까지 떡 배달을 간다. 부평구·계양구, 심지어는 서울 영등포에서까지 주문이 들어올 때도 있다. 무인판매대는 가게를 비워 두는 사이 블로그·SNS에 올라온 소개글을 보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헛걸음하는 경우가 있어 고안한 방법이다.

 기자가 혹시 훔쳐 가는 사람은 없는지 궁금해하자 "떡이 없어졌다고 해도 굶주린 사람들이 너무 절박해 가져가는 거라 믿고 숫자가 맞는지 잘 세 보지도 않는다"며 "오히려 몇 개의 떡을 가져가고 얼마의 돈을 두고 가는지 일일이 쪽지에 적어서 남겨 주는 손님도 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보낸 신뢰를 보답받게 되면 감사할 뿐이다"라고 답했다.

▲ 이종복 사장이 가게 내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2000년 이후 신포국제시장은 많이 변했다. 새롭게 번창한다는 이름에 걸맞게 전통시장 시설·경영 현대화사업의 시범사업이 시작됐다. 문화관광형 전통시장 테마로 지붕을 덮어 씌우고 번듯한 공중화장실이 생겨나고 패션거리가 조성됐다. 방송 등 각종 매체에서 명물 음식들을 홍보하며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광방앗간에는 아직까지 체감되는 변화는 없다.

 이종복 사장은 "문화관광지라고 말하기엔 너무 먹을거리에만 치우쳐 있다. 관광객들이 사람과 문화를 느끼러 오는 게 아니라 단돈 몇만 원만 있으면 서너 식구가 즉석조리 음식들을 배불리 먹고 금방 떠나가 버리는 식이다"라며 아쉬워했다.

▲ 일본의 한 대학에서 문학강의를 했을 때 학생들이 그려준 자신의 캐릭터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성광방앗간은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종복 사장의 아들(29)이 4년째 떡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다.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줘 100년을 채우는 게 그의 목표다. "그 과정에서 우리 방앗간이 신포국제시장의 장승, 터잡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내가 있는 것 자체가 문화이자 상품이 될 수 있고, 언제든지 떡을 먹으러 올 때마다 시간을 거슬러 여행하는 기분이 들게끔 하고 싶습니다."

  김유리 인턴기자 kyr@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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