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도가니탕을 좋아한다. 당신 말로는 고기는 싫은데 도가니는 맛이 있단다. 큰고모의 말을 빌리자면 아버지 형제 6남매가 어릴 적 할머니는 집에서 도가니를 삶아 자식들에게 내줬다고 한다. 그때 추억이 기억나서일까. 기억이 가물한 수년 전 삼강설렁탕을 알게 된 것도 아버지 덕분이었다. 당신은 도가니탕이 ‘끝내주는 곳이 있다’며 큰고모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한 그릇에 1만2천 원이었는데, 당시 싼 가격은 아니었다. 고기와 다르게 쫀득쫀득한 식감과 씹을수록 고소한 맛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얼마 전 취재에 앞서 겸사겸사 다시 찾았을 때 아버지는 육개장과 소주 1병을 시켰다. 당신이 20여 년 전 택시 운전할 때 아침마다 와서 육개장과 해장국을 먹었다며 자칭 ‘단골’임을 내세웠다. 2년 전까지 삼강설렁탕을 운영하던 김주숙(81)사장이 마침 자리에 있었지만 잘 아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찌 됐건 그렇게 삼강설렁탕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 김주숙 삼강설렁탕집 2대 사장과 아들이자 현재 사장인 박영식 씨가 식당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깡시장 상인들의 든든한 밥집

 삼강설렁탕(인천시 중구 경동)이 정확히 언제부터 운영을 시작했는지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다만, 3대 사장이자 현재 운영을 맡고 있는 박영식(58)사장이 창업주인 할아버지 박재황 사장에게서 들은 기억이 1946년이라고 하니 그렇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의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철교로 이어지는 길은 예전 ‘채미전거리’라고 불렸다. ‘채미’는 참외의 사투리로, 김주숙 사장에 따르면 참외 트럭이 동인천역까지 늘어졌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과일과 각종 채소들이 길바닥에 무더기로 쌓여 판매되면서 ‘깡시장’이라고도 불렸다. 삼강설렁탕(옛 삼강옥)은 상인들의 끼니를 책임지는 거리의 대표 밥집이었다.


 "전국의 참외와 과일이 다 이곳으로 와 경매를 했어. 사람이 몰리니 가게가 얼마나 바빴겠어. 새벽부터 앉을 자리가 없었다는 거야. 처음에는 비닐 위에 ‘타마구(콜타르·기름 상태의 끈끈한 검은 액체)’를 입혀서 지붕을 올린 ‘루핑’집이었는데, 수도 없이 수리하고 나중에는 슬레이트도 입혔다가 1983년 지금 건물로 신축한 거야. 새벽 4시부터 저녁 장사까지 하면 쌀 80㎏을 썼어. 지금은 그 양으로 한 달 쓰니 장사가 얼마나 잘됐던 거야." 김주숙 사장의 말이다.

 당시의 인기 메뉴는 불갈비와 설렁탕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예전을 기억하기 위해 메뉴에 써 놓은 불갈비를 보고 주문하는 사람이 있었다. 불갈비는 왕갈비를 드럼통에 연탄불을 켜서 구운 후 손님에게 내놓는 메뉴였다. 채미전거리는 갈비 굽는 냄새로 진동했고, 상인들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서민들의 인기 메뉴인 설렁탕과 갈비탕도 잘 나갔다. 하지만 고깃집(가든)들이 생겨나고 뷔페 식당이 들어서면서 주문은 줄어들었다. 전통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설렁탕 위주로 메뉴를 바꿨고, 이때 도가니탕도 추가됐다.

# 교사에서 식당 주인으로 2대 김주숙 사장

▲ 김주숙 2대 사장이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주숙 사장은 스물셋 되던 해 박재황 사장의 아들인 봉진 씨와 결혼했다. "우리집 양반이랑은 중학교 때 만났어. 그때 우리 양반이 배구 선수였거든. 나도 그랬고. 배구 연습하는 운동장에서 만나 알게 됐지. 나는 경인교대를 나와서 송림학교와 송현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고, 우리 양반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령으로 예편했어. 교직생활 12년째 되던 해 남편이 있는 오산으로 발령이 난 거야. 당시는 장기근속자 일부를 시외로 보냈거든.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2년 동안 인천 밖으로 나가 있었는데, 결국 사표를 냈지. 시아버님도 편찮으셨고. 그때부터 가게 일을 시작한 거야."

 교직을 접고 식당 일을 보면서 김 사장은 인생이 드라마라고 느꼈다. 이전까지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자신에게 인사를 했는데, 인생이 180도 바뀌어 버린 것이다. 식당에서는 항상 겸손해야 하고 먼저 남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삶으로 변했다. 다행히 활동적인 성격이었던 김주숙 사장은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크지 않았다. 특히 가게를 운영하면서 사회활동도 왕성히 했다. 중학교 때 경력을 살려 어머니 배구선수로 활동했고, 군인 남편을 둬 재향군인여성회장도 지냈다. 이때 어머니 배구선수로 일본에 교류 경기를 종종 나갔는데 7대 여인숙, 5대 이발관 등을 볼 수 있었다. 가업을 이어가는 일본의 노포(老鋪)들을 보면서 자신이 삼강옥을 지켜 역사가 있는 식당으로 만든다면 인천에서 유명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문에 잘나가던 시절 주변의 권유에도 신도시로 가게를 옮기는 대신 지금 위치를 고수했다. 자긍심은 있지만 가끔 후회도 된다. 그때 가게를 옮겼으면 재테크는 확실히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 삼강설렁탕 대표메뉴인 설렁탕.
# 사람과 추억이 있는 곳

 삼강설렁탕에서는 30분마다 괘종시계가 내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한눈에 봐도 오래돼 보이는 괘종시계는 시간마다 숫자에 맞춰 종을 울리고, 매 시간 30분마다 한 차례씩 소리가 난다. 동양석유 대표이사를 지낸 박상복 선생이 1983년도에 보내 준 선물이다. 이 외에도 삼강설렁탕에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담겨 있다.

▲ 박영식 씨가 식당주방에서 도가니탕에 들어갈 고기를 손질하고 있다.
 "자유공원에 화교학교가 있잖아. 옛날에는 장수동이나 구월동에서 화교들이 이곳까지 수레를 끌고 왔어. 아버지는 앞에서 끌고 아들은 뒤에서 밀고 오는거야. 당시 화교들은 미나리랑 배추, 부추농사를 지어서 이곳에 가져와 팔았거든. 깡시장에서 채소를 팔고 밥을 먹은 후에 아이는 학교에 가고 아버지는 집에 가는 거야. 그때 왔던 사람들 중 아들이었던 이가 손자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와. 4대가 오는 거지."

 대부분의 단골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수명을 다했지만 일부는 2, 3대가 오는 경우도 있다.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초대 지사장을 지냈고 이비인후과를 운영했던 이영호 박사를 비롯해 김관철 지성소아과 원장, 강원연탄 회장, 최기선 전 인천시장 등도 삼강설렁탕의 단골손님이었다.

# 오래된 가게 유지 위해선 시민 관심 있어야

 4대까지 이어질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박영식 사장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한다.

 박 사장은 중국 유학파다. 중국에서 9년 동안 한의학을 공부했고 일자리까지 얻었지만 생활이 쉽지 않았다. 마흔 초반에 한국으로 들어와 가업을 잇고 있다. 그의 두 딸 역시 한 살과 세 살 때부터 중국생활을 시작했고, 모든 학교를 중국에서 졸업했다. 지금도 중국에서 직장을 구해 거주하고 있다. 박영식 사장은 "우리도 나름대로 열심히 끓여 대겠지만 오래된 가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며 "가게 활성화를 위해 시나 중소기업청 같은 곳에서 관심을 주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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