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속 수염, 이불 밖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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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속 수염, 이불 밖 수염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 기호일보
  • 승인 2019.05.03
  • 10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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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오랜만에 벗들과 반주를 곁들인 식사자리에서 한 친구가 던진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어느 할아버지가 하얀 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길이가 배꼽에 닿을 정도로 무척 길었습니다. 명절 때 할아버지 집에 온 어린 손자가 수염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주무실 때 수염을 이불 속에 넣어두나요, 아니면 이불 밖에 꺼내 놓나요?"

 할아버지는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말해주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할아버지는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잘 때는 몰랐는데 수염의 위치에 골몰하다 보니, 수염을 이불로 덮어도 불편했고 이불 밖에 꺼내놓아도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던 거지요.

 마음은 늘 이렇게 장난을 칩니다. 세월이 지나면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조차 못할 일들이 당시에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의 고민거리로 만드는 것이 곧 ‘마음’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속성을 알아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흥하는 말씨, 망하는 말씨」라는 책에 나오는 두 가지 사례에서 마음의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바스티유감옥에서 사형집행일이 되자, 어느 사형수의 눈을 가린 다음에 단두대에 오르게 한 후, 손과 발을 묶어놓고 집행관이 말했습니다.

 "단두대의 칼날이 목에 떨어지는 순간 너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저 아래에 놓인 양동이에 떨어질 것이고 그러면 너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죽게 될 거다."

 이렇게 말한 후, 칼 대신 나무로 만든 자를 그의 목에 대고 살짝 눌렀고, 그때 양동이에는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도록 장치를 해두었습니다. 처음에는 요동을 치던 사형수가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죽은 겁니다.

 ‘칼’이 아니라 ‘자’였는데도 왜 그가 죽었을까요?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단두대의 칼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도무지 없다고 믿어버린 순간 저렇게 자신의 생명까지도 포기하게 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또 다른 실험은 뉴저지대학교 심리학과 켄싱턴 교수의 실험입니다. 밀봉된 두 개의 작은 병을 들고 온 교수가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여기 있는 병 하나에는 향기로운 가스가 들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독가스가 들어 있다. 이 병을 열면 단 5분 안에 강의실 전체가 가스로 가득 찰 것이다. 내가 먼저 여는 병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아맞혀 보아라. 그런데 나도 어느 병이 독가스가 들었는지 모른다."

 이렇게 말한 교수는 한 개의 병뚜껑을 연 뒤에 인상을 찌푸리며 괴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기침하는 학생, 구토하는 학생, 심지어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사실은 두 병 모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병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경험들을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종종 겪곤 합니다. 이를테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드라마에 심취한 아내가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리자 화장실로 급히 가서 전화를 받는 남편을 보고 불륜을 의심하는 경우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남편이라고 판단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드라마를 통해 불륜남의 속성을 자신의 마음속에 각인시켰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화장실에서 몰래 전화 받는 남자는 모두 불륜남이다 라는 왜곡된 공식에 대입해서 남편을 바라본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우리는 마음이 그려내는 대로 세상을 ‘사실’처럼 왜곡하고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며 살곤 합니다. 그러니 ‘판단’에 앞서 ‘사실’을 먼저 알아보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손자가 수염의 위치를 물었을 때 할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했다면 아마 편히 주무실 수 있었을 겁니다.

 "할아버지는 잠이 들기 때문에 잘 모른단다. 그러니 오늘 밤은 나와 함께 자자꾸나. 네가 일찍 일어나면 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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