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마을의 생성과 현대화는 토목과 노동의 궤적이다.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도 낯간지러웠던 시절, 효성마을을 찾은 이들은 공사장에서 일할 노동자들이었다.
공사에 필요한 인력은 농촌 사람들을 ‘근로보국대’란 이름으로 강제 징집했다. 조선총독부는 ‘국가 총동원령’이라는 법령을 공포하고 ‘근로보국대’란 이름으로 전국 각지 농촌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강제 징집했다. 잡풀이 무성했던 허허벌판이었던 효성동에도 사람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물난리 통에 먹을 것조차 없던 시절 일본인 지주 ‘하시다’에게 효성동 일대 사람들은 겨우 일궈 놓은 논마지기를 헐값에 내어주고 소작인 신세로 떨어져야만 했다.
1951년 봄부터 보급창·의무대·공병대·통신대·항공대 등 예하 부대들이 조병창 자리에 차례로 들어섰다. 부평 미군부대는 한때 단일 지역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풍부한 미군 물자가 유통되면서 이 일대는 흥청거렸다. ‘먹고살만 한 곳’이라는 소문이 전국에 파다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때 4천여 명의 한국인 종업원들이 근무할 정도였다.
애스컴은 1973년 6월 30일 부평지역에서 공식적인 기능을 마치고 예하부대와 시설은 경북 왜관에 있는 캠프 캐롤로 옮겨 갔다. 한국인 근로자 2천400여 명이 실직했다.
효성동 사람의 삶은 그 자체가 가난이었다. 천마산 자락 아래에 말뚝을 박아 줄을 내걸면 그때부터 자기네 땅이 되기 일쑤였다. 대부분 땅을 차지한 건 외지인들이었다. 그 땅은 과수원과 농장으로 점차 커졌다. 하지만 소작농이던 마을 사람들은 끼니 걱정에 또다시 밭에 눌러붙어 기를 쓰고 일해야만 했다.
1960년대 효성동 아이들에게 논두렁·밭두렁은 유일한 놀이터이자 식량 창고였다. 미꾸라지, 개구리 뒷다리를 특식으로 먹었다. 토끼라도 잡는 날은 잔치까지 벌였다. 초등학교조차 다니기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여유 있는 집안 자식은 산곡초로, 대부분은 부평초로 갔다. 학교까지 죽어라 뛰어도 1시간이 넘었다. 기약 없이 오는 유일한 시내버스(2번)를 타려고 해도 1시간 이상 걸어가야 했다.
1970년대 초까지 풍산을 비롯해 효성동의 광대한 논밭 위에는 공장들이 하나둘 건립된다. 아남반도체(전기)의 모기업인 아남산업㈜과 동서식품, 삼익악기 등이 수출공단에 줄지어 자리를 잡았다. 수출공단에 들어가지 못한 기업들과 소상공인들도 주변 자투리 터를 매입해 문을 열었다. 규모가 있는 기업들에 자재 등을 납품하기 위해서였다.
비슷한 시기에 공단 주변으로 경인고속도로까지 개통되면서 공단으로 유입되는 기업과 인구는 급속도로 늘었다. 수출공단엔 효성동의 수많은 젊은 청년들이 취직했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풍산금속 주변인 효성동 사거리에는 식당과 주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효성극장과 당구장 등 여가·편의시설들도 생겼다. 공단 인근은 젊은 남녀들이 모이는 번화가로 변모했고, 상당수가 가정을 이뤄 효성동 등지에 정착했다. 1970년대 중반 효성동엔 새마을운동 본부인 ‘새마을회관’도 세워질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았다.
부평수출공단 가동으로 1983년 옛 북구(부평·계양·서구)지역에 292곳의 공장이 등록됐지만 1992년에는 1천767곳으로 6배 이상 증가했다. 공장 종업원 수도 4만1천여 명에서 13만2천700여 명으로 대폭 상승했다.
이승훈 기자 hun@kihoilbo.co.kr
사진=홍승남 기자 nam1432@kihoilbo.co.kr
사진=계양구,풍산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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