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목표는 친절(親切)이다." 한 노(老)작가가 최근 지방에서 열린 인문학 캠프에서 던진 화두다.

 백발이 된 대작가가 지독한 통찰 끝에 현대인의 삶의 목표로 지목한 것이 ‘친절’이라는 데에 대중은 일면 놀랐다. 삶의 목표로 성공가도(成功街道)를 전제로 한 자신의 행복이나 가족들의 안녕, 자아의 실현 등이 아니라 친절을 꼽은 그의 입장이 궁금해진다. 요즘 같이 비정한 시대에 친절을 삶의 최종적 목표로, 인간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자식들이나 지인들에게 가르치는 부모나 선생, 선배가 있을까. 그나마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마라’ 정도에서 훈육이 끝나는 세상이다. 노작가는 심지어 "내가 죽으면 글 잘 쓰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고 ‘그 사람 참 친절한 사람이었다’라고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허를 찌르는 날카롭고 간결한 어체로 촌철살인(寸鐵殺人)하는 장인(匠人)이 글쓰기보다 이토록 인간성을 앞세운 이유는 뭘까.

 그는 우리 사회가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이 가르쳐준 인간에 대한 예의와 경외심, 연민과 같은 공감능력을 상실했다고 본다. 새가 알을 품듯 몇 달을 기다리고 조용히 앉아 있는 성품을 우리 세대가 길러내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한 곳을 오래 바라보는 능력, 한 곳에 앉아 깊은 생각을 하는 능력, 남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는 히어링(hearing)도 미약하거나 부재한 것도 맞다. 속도와 그 속도에 기반한 변화만을 미덕으로 치켜 세운 탓도 크다.

 이런 세상은 서로 ‘뜨려고’만 하는 호전적 세상, 방송과 사회적관계망서비스 등을 통해 혓바닥을 너무 빨리 놀리는 세상, 어수선하고 천박한 세상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그 결과, 악다구니와 상소리, 욕지거리, 거짓말, 잔재주가 난무하고 사람과의 정신적 교감을 회피하는 즉물적(卽物的) 세태가 됐다고 한다. 이는 불안과 비극이 우리네 일상을 떠나지 않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키우고 여기에서 나오는 친절함이 몸에 배일 수 있도록 우리네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노작가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과업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물에 빠진 타인에게 반사적으로 튜브를 던지는 일부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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