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층 초월한 항일운동… 한 가구 한 명 이상 "대한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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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 초월한 항일운동… 한 가구 한 명 이상 "대한독립 만세"
5. 자주독립 뜨거운 열망… 양평 3·1 만세운동
  • 박종대 기자
  • 승인 2019.06.24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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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양동면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모습.
양평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군사요충지로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숱한 외침을 받을 때마다 국권 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했다.

 일제의 탄압 속에 3·1 만세시위를 사실상 기획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남북 통일을 위해 헌신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양평 출신의 대표적 인물이다.

 양평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과 탑골공원에서 이뤄진 만세시위가 시작된 지 9일 후인 같은 달 10일부터 서종면을 필두로 10개 면에서 많은 민중이 동참했다.

# 양평 만세운동의 특징

 양평문화원이 2014년 펴낸 「양평 3·1운동사」 자료집에 따르면 양평의 3·1만세운동은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이뤄졌다. 이후 같은 달 23일부터 4월까지 양평 전역으로 확산됐다. 이 기간 총 25차례에 걸쳐 약 2만1천 명이 참여하고, 이 중 82명이 일경에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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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양평군 마을 전경
 항일운동은 평화적 시위부터 헌병주재소 습격 등 무력시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벌어졌다.

 특히 군민의 참여도가 무척 높았다. 당시 양평 인구가 6만9천여 명이고 가구 수는 1만3천 가구였다. 양평지역에서 실시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이 2만1천 명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한 가구에 한 명 이상이 참여한 셈이다.

 이는 다른 지역보다 높았던 항일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양평은 3·1운동을 기획한 것으로 알려진 몽양 여운형, 홍남표, 이탁, 양규열, 변준호 등 여러 명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양평 만세운동은 사회적 계급과 계층에 구분 없이 고루 참여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농민에 한정하지 않고 소상공인은 물론 종교인, 교사, 유생,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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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회 양동면 만세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모습.
 # 지역별 만세운동 전개

 양평에서는 서종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현재 문호초등학교의 전신인 문상학교에서 수백 명의 주민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행진을 벌였다.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이뤄진 화서 이항로의 위정척사교육, 문호리에 천주교가 일찍 전파된 까닭에 서종면이 다른 지역보다 일찍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서종면 주민들은 양평읍 만세운동에도 동참하기도 했다.

 양평읍에서는 3월 24일 장날 시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연희전문학교 서기인 이진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양평군에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뜨겁지 않은 점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독립선언서 수십 매와 대한독립회 명의로 된 격문 수십 매를 갖고 3월 23일 서울을 출발해 양평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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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양평군청사.
 그는 장터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들에게 "조선민족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 제국의 굴레를 벗어나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도 이진규와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장을 행진했고, 양평헌병분견소 헌병이 출동해 이진규와 시위에 참여한 곽영준을 구금했다. 군중들은 헌병분견소 앞에 모여 체포된 인사의 석방을 요구했다.

 강상면에서는 3월 29일 교평리나루터에 모인 군중들이 시위를 진행했다. 이곳 나루터는 강상면 주민들이 양평읍의 양근5일장을 보러 가거나 읍내에 다른 볼일을 보려고 매일 같이 왕래하는 도선장이다.

 나루터에 모인 군중들은 서로 들은 나라 사정 정보를 나눴다. ‘조선 독립을 세계 각국이 승인했다’, ‘일본도 우리나라를 내놓으려고 준비하고 있다’ 등 떠도는 이야기였다.

 송학리에 사는 신석영은 이러한 말을 듣고 나루터에 세워져 있던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군중 100여 명도 함께 만세를 부르면서 나루터 주변은 만세시위장으로 변했다. 하지만 일경이 시위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하면서 곧 만세시위는 해산됐다.

 신석영은 만세를 선동한 죄로 끌려가 1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일제 재판을 받으면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기뻐하며 만세를 부른 게 무슨 잘못이냐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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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산리 전투터 표석.
 # 양평군 독립운동가

 곽영준 지사는 1919년 3월 24일 양평읍 양근리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해 이진규가 주도하는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백 매를 시장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들에게 배포했다. 이 일로 체포돼 징역 8월을 받았다.

 또 1922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을 위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돼 징역 7년을 받고 1929년 출옥했다. 1934년에는 양평 적색농민조합에서 활동하는 등 총 8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김경성 선생도 1919년 3월 24일 양근리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해 읍사무소를 습격했다. 면장에게 만세를 강요하는 등 활동에 참여하다 체포돼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당시 이진규와 곽영준이 일경에 붙잡혀 양평 헌병분견소에 잡혀 가자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군중 수백 명과 함께 면사무소, 군청 우편소의 문세를 찢어 버리고 관청 관료들을 구타하면서 창살문을 부숴 버리는 등 격렬한 시위를 진행했다.

 김극선 선생은 함경남도 출생으로 양평에서 살았다. 그는 1919년 3월 12일 보신각 앞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다른 동지들과 함께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에 참여하고 체포된 손병희 등 민족대표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3월 12일 서린동의 영흥관에서 만나 독립만세 운동계획을 상의했다. 김 선생은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에서 민족교육사업에 헌신하기도 했다.

박종대 기자 pjd@kihoilbo.co.kr

사진=<양평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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