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전거 수리중인 박유순 대표.
김명주(87·여)씨는 요즘도 가게에 나와 물건들의 개수를 센다. 이미 수년 전부터 둘째 아들에게 운영을 맡겼음에도 자전거가 몇 대 있는지, 매장에 진열된 자전거 관련 물건들이 없어진 것은 아닌지 확인한다. 하지만 김 씨는 그 물건들이 얼마나 들어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의 행동은 수십 년 동안 남편 없이 홀로 4남매를 키우기 위해 성안상회를 끌고 나가야 했던 억척스러움의 발로다.

아흔을 바라보는 그의 머릿속에는 몇 가지의 큰 줄기가 있다. 가끔씩 가게에 나와 물건들을 세는 것과 1951년 1·4후퇴, 동학농민운동과 천도교다. 김 씨는 이 줄기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반복할 때가 많다. 매일 무엇을 잃어버렸다며 둘째 아들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가끔은 시장도 잘 다녀오고 은행 업무를 보기도 한다. 가게 명의가 모두 김 씨 이름으로 돼 있어서다. 그는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중 70여만 명이 앓고 있는 질환과 싸우고 있다.


# 1955년 실향민 박호영 씨가 ‘천광상회’로 문 열어

부평구 부평대로 37-2에 위치한 삼천리자전거 부평역점은 1955년 황해도 재령 출신의 실향민 고(故) 박호영 씨가 처음 문을 열었다. 1921년생인 박 씨는 재령 옆 동네인 사리원농고를 졸업하고 농촌지도소에서도 일했던 고학력자였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남으로 내려온 그는 영등포를 거쳐 부평에 자리를 잡았다.

부인 김명주 씨를 만난 것도 부평이었다. 둘은 같은 실향민이자 천도교 교인이었다.

1944년 고 김철호 선생이 기아자동차와 삼천리자전거의 전신인 경성정공을 설립한 이후 1952년부터 본격적으로 자전거가 생산된다. 박호영 씨는 최초 ‘천광상회’란 이름으로 삼천리자전거 대리점을 시작한다. 이후 ‘보성윤업사’로 잠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의 성안상회로 변경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가게 전경.
1950년대만 해도 삼천리자전거 대리점은 자전거에 들어가는 약 160개 부품을 각 공장별로 받아 조립해 판매하는 곳이었다. 손기술이 좋았던 박호영 씨는 기술을 배워 부평 전역에 자전거를 판매했다. 막걸리 공판장, 유리가게, 쌀가게, 우체국 등 자동차가 부족했던 시절 자전거는 서민들의 생계수단이자 교통수단이었다. 당시만 해도 선진 기술이었던 자전거를 배우기 위해 평균 3~4명의 견습공들이 박 씨의 집에서 기숙생활을 했다. 김명주 씨는 견습공과 기사들의 끼니 해결을 위해 김장김치를 300포기나 담기도 했다.

최초 부평구 부평대로 우체국 인근에 있었던 가게는 1970년대 현 위치의 2층짜리 목조 건물을 매입하면서 세를 확장한다. 그러나 행운은 길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 박호영 씨가 급환으로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큰딸은 교대를 졸업해 교사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해였고, 둘째 박유순(58)씨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김명주 씨의 억척스러움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부군이 떠나고 6개월간 문을 닫았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들을 먹여살리려면 자신이 성안상회를 운영해야만 했다. 김 씨는 대구와 마산 등에 있던 부품공장에 직접 찾아가 "내가 대신 장사를 할 테니 물건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때 돈 45만 원으로 외상값을 갚은 뒤 "먹고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두 달치 부품을 받은 김 씨는 기술자를 두고 성안상회의 문을 다시 열었다. 네 아이의 엄마는 성안상회와 함께 아이들을 키웠다.

# 1983년, 군 입대와 구속. 형제의 갈라진 운명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성안상회는 다시 변환점을 맞는다.

1983년은 둘째와 셋째인 박유순·흥순 형제에게 잊지 못할 시기였다. 그해 11월 10일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순 씨는 교내 시위를 주도해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그리고 삼수 끝에 대학에 들어갔던 흥순 씨는 앞선 11월 3일 군에 입대한다. 유순 씨는 다행히 특별사면으로 석방됐지만, 학생운동을 노동운동으로 이어가며 집을 나가 자취방에서 공장생활을 한다. 반면 흥순 씨는 복무를 마치고 전역하는 해 가게에서 일하던 한 기사가 자전거 판매 대금을 갖고 도망가면서 어머니와 함께 성안상회를 꾸려가게 된다. 흥순 씨가 23살 때였다.

▲ 박유순 대표.
아버지와 둘째 형 대신 가장 노릇을 이어간 흥순 씨는 열심히 일했다. 노동운동에 빠져 있던 둘째 형의 뒷바라지는 흥순 씨 몫이었다. 형이 도망 다닐 때면 형수에게 생활비를 주기도 했다. 동생의 도움으로 유순 씨는 신념을 지킬 수 있었고 민주노총에서 요직을 맡게 됐다.

시작이 매끄럽지는 못했지만 흥순 씨의 자전거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졌다.

우리나라에 생활자전거밖에 없었던 시절 외국에서 유행하던 산악자전거를 가장 먼저 도입한 게 흥순 씨다. 대한체육회 안에 한국산악자전거연맹을 창설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연맹 이사를 맡으며 각종 산악자전거대회 기술이사로 코스를 만들었으며, 1995년에는 국제대회에 선수들을 데리고 가 동메달을 거머쥐기도 했다. 현재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자영업비서관인 인태연 씨와 함께 자전거도시만들기 운동본부를 만들어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구민들을 대상으로 교육 등을 실시하기도 했다.

"동생이 그냥 자전거 장사만 했다면 더 나은 수익과 여러 가지 이윤을 찾아 업종을 바꿨을 겁니다. 하지만 자전거문화를 만들어 갔기에 계속할 수 있었던 거예요.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과 비전을 갖고 자전거에 대한 애정을 보여 줬기에 지금까지 성안상회를 유지하지 않았나 싶어요."

유순 씨는 하늘나라로 간 동생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회상하는 그의 눈가는 붉어졌다.

2016년 흥순 씨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급환이었다. 64년의 가게 역사 중 절반을 책임졌던 동생이 사라지면서 홀로 남은 어머니와 성안상회는 허공에 떴다. 가족회의 끝에 민주노총에서 근무했던 유순 씨가 휴직을 내고 운영을 시작했다. 학생운동을 했던 형 때문에 군대에서도 고초를 받았던 동생, 어린 나이에 가장이 돼 자신을 희생했던 동생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억척스러웠던 어머니에게 아픔이 찾아온 것도 동생의 죽음과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결국 민주노총에 사표를 낸 유순 씨는 2017년부터 정식으로 성안상회의 네 번째 주인이 됐다.

# 자전거와 함께 새로 시작하는 지역운동

"올해 회사를 그만둔 친구와 함께 성안상회를 운영하고 있어요. 영업본부장을 했으니 보는 눈이 저보다 높았죠. 첫 번째가 가게 리모델링이에요. 손님이 와서 쾌적하게 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시장조사도 다녔죠. 친구는 지금 온라인 사업을 담당하고 있답니다."

박유순 씨 역시 장사만 이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반평생을 노동운동에 바쳤던 활동가답게 이제는 지역운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서울에서 운영되고 있는 ‘민중의 집’을 부평에서도 해 보고 싶다는 포부다. 외국인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무료 노동상담과 다양한 지원활동을 하고, 여성과 노인 등 주민들을 대상으로 자전거교육도 이어가고 싶다.

▲ 가게 내 작업 공간.
유순 씨는 "지역에는 굉장히 많은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며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 지금까지 내 삶의 철학"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나아가 시민들이 자전거를 타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일도 해 보고 싶다"며 "자전거 이용 길이 열린다면 다소 먼 거리도 출퇴근이 가능해지고 친환경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병기 기자 rove0524@kihoilbo.co.kr

 사진=이진우 기자 ljw@kihoilbo.co.kr

 <인천도시역사관 자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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