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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옥엽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위원
근래 역사 연구의 방법론이 다양해졌다. 사회 구조나 제도, 시설 등 하드웨어 정립을 모색했던 과거 거시사적 경향은 이제 세부 콘텐츠를 찾아가는 미시사적 시각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추세에서는 문헌자료와 유물·유적 외에도 구술기록이나 사진, 일기 심지어 메모지나 간단한 스케치, 편지, 신문, 광고 등 그야말로 세세한 자료들이 연구의 대상이 된다. 무엇보다 역사 자료는 오랜 시간 지속적인 발굴과 수집을 필요로 하고 보다 많은 다양한 자료의 확보와 이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그 의미를 갖는다.

 역사 자료 중, 특히 근대 이후 발행된 ‘신문’은 시대상을 한눈에 읽을 수 있는 핵심적인 코드이자 각종 자료의 결집체라 할 수 있다. 지면 구성을 보면, 사회적 제언, 기획기사, 정치·사회적 이슈와 사건 기사는 물론 다양한 상업 광고에 이르기까지 당시 공동체 구성원의 생활 모습, 사회적 지향점과 방향성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문(新聞)’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는 매체로 다양한 주제를 최신 정보로 채워 대중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광고를 싣는 것도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또, 신문의 제호를 통해서도 역할 변천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포스트’가 주로 집 앞의 우편함으로까지 배달됐기 때문이라면 ‘애드버타이저’는 신문이 상업 뉴스로서 중요성이 높아지고 광고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던 시기에 붙은 이름이다. ‘저널’은 날마다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일지라는 뜻으로 신문의 기록성을 중시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 신문은 1883년 발행한 관보 성격의 ‘한성순보’이지만, 민간 신문의 효시는 ‘독립신문’(1896)을 꼽는다. 특히, 신문에 실린 광고는 당대의 경제구조와 사회문화를 반영하는 역사적인 텍스트라 할 수 있다. 광고는 근대 인쇄매체 발달과 비례해서 증가해 왔는데 다양한 광고기법이 사용됐다. 광고를 통해 상품정보, 사회적 동향, 근대적 문화코드, 가치, 관념을 살펴볼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적 상업광고는 인천에서 그 상업적 기반을 확고히 한 세창양행이 1886년 간행된 ‘한성주보’ 2월 22일 제4호에 실은 ‘덕상 세창양행 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에서 출발한다. "쇠가죽, 말가죽, 개가죽 등을 사들이고 자명종 시계, 서양바늘, 유리, 성냥 등을 외국에서 들여다가 팔고 있으니 많이 이용해 달라"는 내용으로 광고라는 이름 대신 ‘고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이나 노인이 온다 해도 속이지 않고 공정한 가격으로 팔겠다"는 문구 그대로 ‘고백’인 셈이다.

 오늘날과 같은 ‘광고’라는 이름으로 광고가 시작된 것은 개항 후 인천에 진출한 일본 상인들의 광고문을 통해서였는데, 1886년 6월 31일자 ‘한성주보’ 제22호에 염색약 제조법 광고, 옷감과 곡물 등을 판매하는 상점광고가 그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광고는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과 비슷한 시기의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민간신문 등이 발행되면서 약, 책 등 다양한 광고가 실리게 된다. 그 중에서도 수입담배와 염색약이 대표적인 광고였다. 이러한 자료는 당시 사회상을 복원하는데 필요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의 새로운 정보와 사회적 이슈들을 담은 신문의 주요 역할은 무엇보다 정확한 사실 전달이다. 신문기자를 ‘무관(無冠)의 제왕(帝王)’이라 칭하는 것도 그들의 ‘정론직필(正論直筆)’ 정신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역사에서 사관(史官)이 가져야 할 춘추필법(春秋筆法)이나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며 랑케의 이른바 ‘있던 그대로’의 역사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뀐 오늘에 인천지역 신문들의 약진을 접하면서 더욱 객관적이고 공정한 사실 전달을 통해 훗날 인천 역사를 증언하는 또 하나의 귀중한 자료로 기능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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