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이후에는 북한 피란민들이 많이 살았던 곳, 지금은 교동대교가 놓이면서 관광객이 많이 찾는 강화 교동도.

 북한과 지척인 교동에 50년 넘게 자리를 지키며 교동주민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의 머리를 단정하게 만든 장인이 있다.

▲ 지광식 씨가 지난달 28일 자신이 운영하는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이발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바로 1965년 교동 대룡시장 한편에 ‘교동이발관’을 창업한 황해도 연백 출신의 지광식(79) 사장이다.

 지 사장은 한국전쟁 때 피란을 와 교동에 정착했다. 피란민으로 먹고살기가 어려워 이발소 조수로 들어갔다. 당시 황재하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이발관에서 일했는데, 지 사장은 여기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다.

 #어려웠던 시절 이발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간 지광식 사장

 "한국전쟁이 터지고 아버지는 먼저 피란을 가 교동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고, 이어 1년 있다가 나하고 나머지 가족도 피란을 왔지. 20살도 안 돼 멀리 타향에 내려와 먹고살기가 너무 막막했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했지. 그러다 우연찮게 이발소에 발을 들이게 됐어."

 이렇게 지 사장은 교동으로 피란을 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지 사장이 이발소 일을 시작한 것은 우연히 아랫집 사는 사람의 권유로 시작했다.


 "그때 우리 아랫집도 피란 온 사람인데, 연백에서 온 사람이야. 그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여기 이 자리에서 이발소를 하고 있었어. 그때 나는 산에서 썩은 나무를 모아 장에다 팔아 생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었지. 이 모습을 본 아랫집 사람이 나보고 이발소에서 물 나르는 일을 권유했고, 월급도 준다는 말에 이발소 일을 시작했어."

 이렇게 이발소에 취직한 지 사장이 본격적으로 이발 기술을 배우기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다.

 "물지게를 지고 한 시간 이상 걸려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나면 그 물은 손님들 머리를 감기고, 이발소 청소를 하는데 사용해야 함에도 주인집 가족들이 따로 빨래를 해가며 사용하는 것을 보고 너무 화가 났지. 그래서 한바탕하고 월급을 받고는 그만 뒀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막을 안 주인이 월급을 올려주겠다며 협상을 해왔어. 그래서 마지못해 다시 이발소 일을 계속 했어."

 자칫 지금의 교동이발관이 사라질 뻔했던 ‘물 사건’이 어려운 시절 월급 인상으로 맥을 이어가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발소 일을 3년 정도 하면서 지광식 사장은 조금씩 어깨너머 기술을 익혀 갔다. 그리고 마침내 교동이발관이 탄생한다.

#교동이발관의 탄생

 지 사장은 3년 정도 몰래 기술을 배워 면도부터 이발까지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됐고, 지난 1963년 당시 사장이었던 황재하 씨가 강화로 떠나면서 얼마 안 있어 지 사장이 이발소를 인수했다. 그렇게 교동이발관을 차린 지 사장은 한자리에서 지금까지 이발관을 지키고 있다.

▲ 손때 묻은 빗과 가위.
 "버티고 버텨서 17살에 이발소에 들어와 20살 가을에 이발사가 됐지. 그리고 다른 곳에서 몇 년 동안 독립해서 이발소를 운영했는데, 나름 장사가 잘 됐어. 그러니까 나를 가르쳐 준 주인이 술만 먹으면 저녁 때 와서 문짝을 뻥뻥 차고 난리를 쳤어. 당시 내가 좀 젊다 보니 손님들이 나한테 몰렸지. 화가 날만도 해. 하여튼 나도 화가 많이 났어. 그래서 대판 한번 싸웠더니 그 다음부터는 오지 않았어. 그러고 얼마 안 있어 그 주인이 자신이 강화읍내로 간다며 이발소를 판다고 하길래 나도 당시 땅 주인이 세를 올려 달라해 머리가 아픈 찰라에 그 이발소를 내가 샀어. 그러고는 지금까지 한 60년 가까이 이 일을 하고 있지 내가."

#교동이발관의 호황에서 불황

 지 사장은 1980년대 이발관 생활에 싫증이 나서 외지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교동으로 돌아와 이발관을 이어갔다.

 손님은 모두 교동 주민들이었고, 교동의 다른 가게가 그렇듯 1970~1980년대가 가장 호황기였다. 주민들이 주고객이다 보니 문을 여닫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새벽이나 한밤중에도 창을 두드려 머리를 깎아 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1990년대 교동의 인구가 감소하면서 손님은 줄어들었다.

 "교동이발관을 개업하고 한때는 정말 손님이 많아 쉴 틈이 없었어. 혼자서 할 수 없어 직원 2명을 채용할 정도였지. 그런데 1990년대 이후부터 미용실이 생기고, 또 인구도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이발소 손님들의 발이 점점 뜸하기 시작했지. 그러니까 직원들도 한둘 떠나고 이렇게 지금은 나 혼자 남았어. 아! 나도 직원들을 가르쳐서 도시로 보낸 적도 있어."

 이제 이발소 일이 조금씩 힘이 든다는 지 사장은 서서히 교동이발관의 폐업을 준비하고 있다. 교동이발관은 지 사장이 혼자 일군 일터이자 사업장이다. 앞으로 대를 물려받을 자식도 없다. 또 이곳에서 이발관을 인수할 사람도 없다.

 그래서 지 사장은 아쉽지만 자신이 언제까지 이 일을 할지 모르나 힘이 닿는 데까지 할 생각이다. 그 이후에는 자신이 아닌 기관의 몫이다.

 "8년 전 마누라가 먼저 저세상으로 갔지. 솔직히 이 일을 물려받을 자식이 없어. 앞으로 어찌할지 잘 모르겠어. 지금도 손님이라고는 단골손님뿐이야. 이렇게 관광객이나 기자 양반들이 가끔 찾을 뿐 예전처럼 많은 손님이 오는 것도 아니야. 나도 지금은 그냥 소일거리로 여기에 앉아 있는 거야."

 지 사장은 다른 것은 몰라도 이발 기술만큼은 자신 있다고 한다. 손님의 요구에 최대한 맞춰가며 이발을 한다. 이발 기구는 인천의 기구상에 전화로 주문해 납품받고 있는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발관을 운영할 예정이다.

▲ 이발소 안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지광식 사장.
 하지만 지 사장의 고집은 영원한 교동이발관 이발사다.

 "솔직히 누가 과업을 이어줄 사람이 있다면 이발관의 변화를 줄 마음도 있지만, 지금은 그냥 도시에서 오는 분들이 옛날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서 그냥 두고 있어. 또 리모델링을 하고 싶어도 나도 언제 그만둘지 계산이 안 돼. 나이가 여든이 넘으니 죽는 날까지 이렇게 있다가 가는 거지 뭐."

 #역사 속에 남을 교동이발관

 지금도 교동 대룡시장을 찾아온 관광객들은 ‘시간이 멈춘 이발관’을 사진기에 담고 있다. 교동이발관 앞에 서면 예전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이발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여느 노포와 달리 교동이발관은 대를 이을 사람이 없는 그냥 역사 속으로 남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멈춘 교동이발관. 손님이 많이 드나들지 않지만, 교동이발관은 예전의 향수를 그윽하게 전하고 있다. 앞으로 교동이발관이 어떻게 변할지 자못 궁금하다.

최유탁 기자 cyt@kihoilbo.co.kr

사진=노희동 객원기자

 <인천도시역사관 자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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