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胎峰)을 파괴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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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봉(胎峰)을 파괴한 사람들
김대훈 김포정치개혁시민연대 운영위원장
  • 기호일보
  • 승인 2019.08.22
  •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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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훈 김포정치개혁시민연대 운영위원장
태봉(胎峰, 胎封)이란 태실(胎室)이 조성돼 있는 산 혹은 ‘태(胎)를 봉(封)한다’(胎封)는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생명의 탄생을 그 시작부터 중히 여겨 태(胎)를 소중히 여기고 신성시하는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었다. 특히 조선왕실에서는 태(胎)가 향후 아이의 성쇠를 결정할 뿐 아니라 나라의 국운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하여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길지(吉地)를 선정해 태를 봉안하는 특별한 의식을 치렀다. 이를 장태(藏胎) 또는 안태(安胎) 의식이라 하고 이때 태를 봉안한 산(山)을 태봉(胎峰)이라 한다.

 이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안태의궤, 안태등록, 태실가봉의궤 등 많은 문헌으로 전해지고 또 태실 유적과 태항아리 등 유물도 전해져 그 화려했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1929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왕실의 정통성을 말살하고 조선의 멸망을 온 백성에게 알리기 위해 태실을 고의적으로 파괴, 훼손했으며 왕(22위)과 일부 왕자, 공주의 태(32위)는 고양시 서삼릉에 옮겨 일본의 일(日)자를 딴 담장을 두르고 태실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이렇다 할 관리를 받지 못한 채 극히 일부만 문화재로 지정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조강저수지 북쪽에 접해 있고 애기봉과 다정한 오누이처럼 마주보고 서있던, 평화누리길 2코스 중 가장 아름답던 길옆의 태봉(胎峰)은 해발 75m 정도 되는 산봉우리로 중종의 다섯째 적녀이자 문정왕후의 넷째 딸이며 명종대왕의 친동생인 인순공주(仁順公主, 1542년~1545년)의 태를 묻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김포의 한 토건업자가 2010년 버섯재배사 및 진입로 목적으로 토목공사 허가를 득한 후 일련의 과정을 거쳐 임야 수천 ㎡를 훼손하고 형사 고발돼 법원에서 원상복구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복구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미룬 채 골재 생산에만 열을 올려 수년 동안 천문학적인 금액의 골재를 판매한 것으로 전해지는 사이 애절한 스토리를 품은 아름답던 태봉(胎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름답던 태봉(胎峰)은 김포의 한 개발업자의 탐욕과 그 탐욕에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들에 의해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산봉우리만 사라진 것이 아니고 김포와 김포인들의 문화와 역사, 스토리, 정신, 사상, 생활이며 철학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앞서 2008년 문화재청은 태실(胎室)에 대한 보존 정비가 시급해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뢰, ‘태봉 현황조사 및 복원정비 계획(안) 수립’이라는 사업명으로, 2008년 3월부터 12월까지 각 지자체와 함께 조사를 진행한 후 ‘조선왕실의 태봉(朝鮮王室의 胎峰)’이란 책으로 엮어 1차 조사를 완료한다.

 조사 후 조선왕실의 태봉 보존 정비 기본방안 관련 1. 현황파악 2. 현지조사 실시 3. 조치방안 분류 4. 복원정비 추진을 통한 결과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보전 방안 수립과 문화재 지정 추진 등을 문화재청에 제안, 각 지자체에 요구한다.

 문화재청에서 2008년 태봉 현황조사 및 복원정비 계획이 수립된 후에도 김포시는 조선왕실의 태봉 유적에 대해 현상을 보존해 더 이상 훼손과 도굴을 방지하고 아울러 파괴되고 유실된 태실에 대한 조사 현황을 바탕으로 단계적인 중장기 복원정비 계획을 수립해 그 원형을 되살려야 함에도 그 직무는 내팽개친 채 개발업자들의 문화재 및 자연생태 파괴 행위에 앞잡이 노릇으로 일관, 태봉이 흔적도 없이 파괴돼 버린 결과를 낳았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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