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포구문화로서는 유일한 조강 치군패는 접경지역 조강에 있었던 3개 포구 마을(강령포, 조강포, 마근포)에서 성행하던 민속놀이다. 1953년 포구 마을이 사라지면서 치군패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으나 66년 만에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복원, 재현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김포시의 문화유산이자 자랑인 조강 치군패의 과거와 오늘을 재조명해 보존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편집자 주>

▲ 연습에 매진 중인 김포시 민속예술 조강 치군패 회원들.
조강(祖江)은 김포시와 북한 개풍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과 북의 접경지역에 속한 한강하구에 있는 강(江)이다.

 조강을 기점으로 위로는 임진강과 한강이 있고 아래로는 북한 예성강과 김포 염하와 연결돼 있으며, 서해안의 밀물과 썰물이 조강에서 합수하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강(江) 이름을 祖(조)로 사용해 김포에서는 할아버지 강이라고 하며, 기록에는 삼기하(三岐河)로 나와 있다.

 조강은 강의 뿌리요 중심이다. 고려시대 이규보의 축일조석시(逐日潮汐詩)와 조선시대 토정 이지함(李之涵, 1517~1578)의 조강물참은 서해안에서 한강과 임진강을 운행하는 선박의 시간표로 사용됐으며, 조강에 있는 강녕포구와 조강포구는 세곡선과 화물, 여객선이 정박하는 터미널 역할을 했던 곳이다.

 

 『사흘은 토끼때 사흘은 용때

 사흘은 뱀때 하루는 말때이며

 양때도 세번 잔나비때도 두 번인데

 달이 기운후에도 이와 같도다』

  -이규보의 축일조석시

 

 조강에 집중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주제는 용(龍)이다. 조강에 있는 섬 유도는 여의주요, 용강리의 용연은 이무기가 용이 돼 승천했다는 설화가 있고 용부리·용허리·용호사(龍虎寺) 등 조강 일대는 용과 밀접하다. 조강 치군패도 마찬가지다. 용왕제에 참가하고 용왕제가 끝나면 한바탕 포구에서 놀이마당을 펼쳤다.

 조강을 배경으로 하는 조선시대 작품으로는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 용궁부연록에는 조강신(祖江神)의 노래가 있다. 용궁부연록의 주요 배경은 개성의 용연과 김포의 조강으로 접경지역 김포로서는 의미가 깊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에서 용왕은 고려시대 문사(文士)로 평판이 높았던 한생(韓生)을 용궁으로 초대해 김포의 조강을 주관하는 조강신(祖江神)과 파주 임진강을 주관하는 낙하리에 있는 낙하신(洛河神), 예성강 하류와 조강의 하류와 만나는 벽란도로 유명했던 벽란신(璧瀾神)을 초대해서 서로 시를 지어 노래하고 가무를 즐기는 내용이 주요 줄거리다.

▲ 조강 포구 마을 그림.
 이 같이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조강은 현재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김포 조강에 있는 조강포, 강녕포, 마근포구 마을도 1953년 철책과 논으로 바뀌었다. 삼국시대부터 1953년까지 번성했던 곳에 남아 있던 포구문화도 마을과 함께 사라진 지 올해로 66년이 됐다.

 김포시 조강 치군패는 그곳 포구마을에 있었던 민속예술이다. 당시 마을에 살았던 어른들이 가락을 면면이 이어왔던 것을 복원해 재현에 이르게 된 전통문화다.

 조강 치군패의 특징은 농업에서 태동한 농악과는 다르다. 어업과 포구시장, 용왕제와 연관돼 있는 물의 문화요 포구문화다. 어른들의 구술에 따르면 청년들에게 색동저고리(여복)를 입혀서 나가면 꽃밭을 이뤘다고 한다.

 치군패는 두레농악의 김매기나 추수걷이는 없고 제금, 소고, 무등 놀이가 발달했다.

 조강과 조강포구가 당시 어떤 곳인지는 조선시대 신유한(1681∼1752)의 조강행(祖江行)에 묘사돼 있다. 17세기 조강포구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유한은 봄날에 작은 배를 타고 한강을 유람하던 중 조강포구에 다다른다. 조강포구 선착장에 배를 대고 포구의 촌로에게서 조강이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합수하는 곳임을 듣는다. 해 질 무렵 포구의 거리를 쇼핑하면서 베(명주실, 옷), 고기, 소금, 과일, 쌀 등을 산처럼 쌓아놓고 매매하는 상점들의 풍경과 아름다운 미녀들이 단장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술을 파는 젊은 기생들과 수작하는 뱃사공, 길손들이 주고받는 노랫소리와 날마다 새롭게 흐르는 강물에 빗대어 술잔을 기울이고 팁을 주는 주막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천 척이 넘는 배들은 강에 띄워져 있거나 작은 배들이 선착장에 베틀에서 실을 짜는 북처럼 일렬로 붙어 있는 모습에서 조강은 대동강도 견주지 못할 정도로 풍성하고 번성하는 항구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 1953년 조강 포구 마을이 없어지면서 지금은 비문만 남아 있다.
 조강 치군패는 조강포구의 풍성한 경제상황과 맞물려 성행한 민속예술로서 화려하고 활기 있는 놀이로 계승되고 있는 유일한 포구문화로 남아 있다. 화려하고 풍성했던 조강과 조강포구의 역할이 김포(金浦)의 도시 명칭(浦)에 포함돼 있으나 현재는 포구도시의 기능이 정지돼 있다.

 남북이 분단된 대한민국의 모습이 그대로 이곳에 남아 있고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도시 전체가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어 철책성이 된 곳이 김포다.

 김포문화원은 치군패를 비롯해 포구문화를 보존하고 군사지역으로 시민들이 평소 가지 못하고 보지 못했던 문화를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접경지역 시민 문화 치유 프로그램’을 계획해 단절된 문화를 도시문화로 이어가고 있다.

 문화 치유 프로그램 1호로 진행하고 있는 치군패는 지난 5월부터 70명의 회원들이 준비해 오는 21일 경기도민속예술대회에 참가한다. 시민들은 평화로운 포구마을에서 꽃밭을 이뤘던 치군패의 아름답고 활기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김포=이정택 기자 ljt@kihoilbo.co.kr

사진=<김포문화원 제공>

<자료=김포문화원 정현채 사무국장(조강 치군패 발굴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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