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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구 청운대학교 영어과 교수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말과 글 외에 그 사람을 드러내주는 다른 방도가 마땅치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언어가 ‘존재의 집’이다. 그러나 언어 외에도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들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주는 경우도 많다. 말로는 정의를 부르짖지만 행실이 형편 없어 파국을 맞는 사람도 많다. 사람에 대한 신뢰는 언행의 일치에서 출발한다. 요즘, 자신이 한 말과 글이 부메랑이 돼 신산(辛酸)의 시기를 보내는 조국 교수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언행의 불일치가 자신의 발등을 찍고 있는 셈이다.

희랍신화에는 자신의 집에 쇠로 된 침대를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늘려서 죽이고, 크면 다리를 잘라서 죽이는 프로크로테스(Procrustes)가 등장한다. 자신의 마음대로 기준을 정해 놓고 무고한 사람을 죽였던 그도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를 죽이려다가 그에 의해 자신이 했던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다. 내 기준의 침대에 타인을 눕혀 재단(裁斷)하려고 하는 것은 ‘프로크로테스의 침대’를 연상케 한다. 여기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없다. 자신들이 만든 침대에 상대방을 눕히려고 하는 사회 및 개인의 심리는 당대에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도덕과 예(禮)의 근본은 역지사지에 기초한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이기심을 강하게 드러내는 사회는 이전투구의 추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서로의 이기심이 충돌하는 사회에서는 서로를 향한 투쟁이 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기심을 자제하고 다른 집단과 연결해야 오히려 이기심을 채울 수 있다는 ‘비사교적 사교성(Ungesellige Geselligkeit)’을 칸트는 언급했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투쟁을 피하기 위해 동양의 고대사회에서는 인의, 예지, 신애를 강조했다. 서양 중세사회에서도 믿음, 소망, 사랑을 제일의 덕목으로 여겼다.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도 더 이상 해체 불가능해 보이는, 타인을 배려하는 ‘환대(hospitality)’철학을 찾아냈다.

인류가 만들어낸 타인에 대한 사랑, 예의, 믿음 등은 이미 예수, 공자, 부처가 살았던 시대부터 우리 삶속에 자리 잡았다.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이 시대를 ‘기축시대(Axial Age)’라 부른다. 기축시대 이후로 이들이 설파한 개념들은 우리의 삶에서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들이 주장한 것은 대가 없는 사랑이며 타인에 대한 환대다. 그렇지만 서양 근세에서는 이것만으로 사회 유지가 어려워 최소한의 도덕인 법을 만들어 냈다. 이기심을 마음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법은 합리적 이기주의자들의 약속일 수 있다.

논어의 첫 장을 펼치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를 확장해 보면 배우는 것도 즐겁고, 이를 연습해 내 것으로 만드는 것도 즐겁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 배우는 것은 많지만 내 것으로 체득화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재승박덕(才勝薄德)해지기 십상이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양(修養)을 강조했고, 특히 혼자 있을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신독(愼獨)을 선비의 삶 중심에 놓았다.

말과 몸가짐이 괴리를 보일 때 배움은 의미가 없다. 배운 것을 올바르게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가 덕(virtues)이다. 존경받았던 서양의 왕족, 귀족층의 유덕(有德)함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예(禮)는 추석 때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만이 아니라 추상적 도덕개념을 구체화한 매뉴얼의 실행 결과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이다. 법을 어겼는지 아닌지 애매한 담벼락 위를 걷는 자는 먼저 수신(修身)하고 법 이전의 예를 실천·반복해야 한다.

법을 어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삶의 흔적들이 정의롭지 못하면 파국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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