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jpg
▲ 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누구나 절대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그것은 죽음과 세금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으로 끝일까? 필자가 볼 때 또 하나가 있다. 이것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에게서 자신을 격리시키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제 짐작이 갈 것이다. 바로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이다. 영화 ‘캐스트어웨이(Castaway)’에서 혼자서 배구공과 말다툼하는 톰 행크스를 봤다면 고립된 상태에서조차 사람은 갈등 관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교사와 학생 간의 심화되는 갈등이 다양한 교육문제 나아가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자신의 필력으로 「안나카레리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제각각이다"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 간 갈등은 서로의 접근법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가 크다. 이유 또한 결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갈등을 유발하는 행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려는 자세다. 이것은 마치 ‘오케이 목장의 결투’와 같다. 결과는 신속하겠지만 잔인하고 파괴적이다. 둘째, 피하는 자세다. 학생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도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칠 줄 모른다. 셋째,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저 무시하는 자세다. 여기선 철저한 교사의 방관적 태도와 직무유기가 발생한다. 넷째, 투덜대고 불평하는 자세다. 교사가 희생자인 양 행동하는 것은 갈등을 치유할 수 없다. 다섯째, 점수를 매기는 자세다. 학생이 몇 번 잘못하고 자신이 몇 번 잘못했는지 하나하나 마음속에 새기는 것은 결코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없다. 여섯째, 교사라는 직위를 이용해 해결하는 자세다. 이것은 갈등을 본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만 갈등을 연기할 뿐이다. 일곱째, 항복하는 자세다. 포기하는 것은 문제를 영원히 덮어두는 것이다.

 이처럼 교사와 학생 간의 갈등은 어느 것을 선호하느냐에 따라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왜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불행히도 2018년 한 해만 해도 교직에서 명퇴자가 전국적으로 2천 명이 훨씬 넘었다. 갈수록 학생과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힘들다고 교단을 떠나려 한다. 물론 학부모의 부당한 압력과 민원에 의해서 갈등이 심화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교사와 학생 간의 갈등으로 교직을 떠나는 이유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미 각 지역별로 교육당국은 이제 학생이 아닌 소속 교사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돌봄 정책을 펼치고 있다. 교권보호를 위한 다양한 정책도 등장하고 있다. 법으로도 제도화해 해결하려 한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갈수록 교사들은 교권이 망가져 더 이상 교육을 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몇 년 전에 퇴직하던 어느 교장 선생님의 "나까지는 금메달이었지만 앞으로는 목메달이 될 거다" 라는 농담과 자조 섞인 말이 귓가를 맴돈다.

 시대가 그렇다고 국가의 백년대계인 교육의 위상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늘도 묵묵히 혁신교육을 위해서 가지 않은 길을 택해 교육자적 사명을 다하는 교사들이 있다. 갈등문제 해결은 의외로 수월할 수 있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학생을 대접해주면 된다. 또 ‘학생은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이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가져야 한다. 눈높이를 낮춰 학생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학생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교사라는 직업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의 모든 갈등은 사랑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 - 사제동행, 청출어람, 교학상장 등-는 고문(古文)에서만 등장하는 사어(死語)가 아니다. 이 시대에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행복해지는 이유가 더욱 비슷하길 바란다. 그것은 ‘안나카레리나 법칙’만이 아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교직의 마지막 자존감이고 사명감이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