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생각」이라는 책에 가난한 시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병상에 둬야만 했습니다. 자신은 무명의 시인이어서 차비조차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있는 병원까지 십여 ㎞를 걸어가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날은 아내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는 철둑길 사이에 핀 예쁜 꽃을 꺾어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삼 년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내 곁에 그 꽃을 조심스레 놓고 그 옆에 그림엽서도 한 장 놓았습니다. 엽서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행복해."
제가 가난한 남편이 되어봅니다. 엽서에 ‘당신이 내 곁에 있어서 행복해’라는 글을 쓸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철길에서 꺾은 꽃과 슬픈 사랑의 심정으로 쓴 엽서를 아내의 머리맡에 놓을 때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미소를 지으면서 놓았겠지만 마음속엔 눈물이 바다를 이뤘을 겁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이 무척이나 미웠을 겁니다. 그런 자신에게 시집와 평생 고생만 하다가 저렇게 의식을 잃고 쓰러져 아무 말도 못하는 아내에게 너무나도 죄스러웠을 겁니다.
이번에는 아내가 되어봅니다. 삼 년째 말도 못하고 식물인간으로 살고 있습니다. 비록 말은 할 수가 없지만 남편의 행동 하나하나를 느껴봅니다. 생활력은 없지만 그래도 착한 남편입니다. 신혼 때는 희망도 걸어보았습니다.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 구석방에 하루 종일 틀어박혀 시를 쓰는 그가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병들어 죽음만을 기다리는 지난 3년 동안, 그렇게도 답답했던 남편만이 고독한 병실을 찾아줬습니다. 그런 그에게 미안했습니다. 그동안 더 잘해주지 못해서 말입니다. 이젠 잘해주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나는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늘 남편이 곁에 있어 안심이 됩니다.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이유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존재가 자신에게 ‘유익함’을 주거나 ‘즐거움’을 주거나 또는 ‘그냥’ 그 존재가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겁니다.
자신에게 유익함이나 즐거움을 주는 사랑을 도구적 사랑과 쾌락적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랑은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이어서 그 사람이 자신에게 더 이상 유익함이나 즐거움을 주지 못하면 가차 없이 지금까지의 사랑을 차버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랑은 ‘완전한 사랑’으로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사랑입니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곧 완전한 사랑입니다. 비록 식물인간이어도 아직 살아서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습니다. 문득 보고 싶을 때 느닷없이 찾아가 숨 쉬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라는 책에서 강렬한 삶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평생 산골에서 일하느라 허리가 굽고 치아는 하나밖에 없는 99세 노모를 위해 손수레를 만들어 900일 동안 여행한 74세 아들이 있다. 나는 제목을 이렇게 붙이고 싶다. ‘당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 내 생에 가장 행복했습니다’라고."
74세 아들 역시 가난한 시인처럼 ‘완전한’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하니 말입니다. 곧 100세가 되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려고 여행을 보내드리고 싶지만 가난 탓에 그렇게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은 손수레였습니다. 그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테니까요. 어머니에게 무척이나 미안해했을 겁니다. 가난한 자신을 탓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책의 저자가 제목을 붙이고 싶다는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이 내 생에 가장 행복했습니다’라는 글귀가 가슴 저미는 감동을 부릅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과 작별할 때 이런 말로 그와의 작별을 아름답게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 사람과 함께할 때 시인과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한없이 사랑해야만 한다고 다짐해봅니다. 그래야 작별마저도 이렇게 아름다운 울림으로 세상을 촉촉이 적실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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