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일(知日)과 극일(克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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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일(知日)과 극일(克日)
강옥엽 전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19.09.20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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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엽 전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강옥엽 전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

125년 전, 청일전쟁 시기 동아시아 정세를 표현한 풍자화가 있다.  ‘낚시놀이’란 제목의 이 풍자화는 조선을 ‘물고기’ 신세로 묘사하고 있다. 조선을 대상으로 일본인과 중국인이 낚시를 하고 다리 위에는 러시아 군인이 낚싯대를 들고 지켜보는 삽화이다. 이 풍자화는 프랑스인 시사만화가 조르주 페르디낭 비고(Georges Ferdinand Bigot, 1860~1927)가 그린 그림인데, 그는 21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18년 동안 메이지시대 화가로 활동하면서 다수의 풍자화와 기록화를 남겼다. 1887년 2월 15일에는 거류지의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풍자만화 잡지 「도바에(TOBAE)」를 창간하고 일본의 정치를 풍자만화로 발표했는데 ‘낚시놀이’ 는 여기에 실린 풍자화이다. 그가 남긴 다수의 그림은 당시 일본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19년 현재, 동아시아 지역 정세는 그때와 거의 흡사한 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동아시아의 문호를 개방시켰고 개항은 기존 질서를 동요시키면서 중국, 일본, 조선에 생소한 역사적 경험과 시련을 수반했다. 중국은 1842년 영국과의 아편전쟁 결과 광둥, 상하이 등 다섯 항구를 열었고, 1860년에는 영국, 프랑스와 맺은 베이징경조약으로 톈진을 개항했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을 통해 개항하면서, 1858년 통상조약에 따라 요코하마, 나가사키 등 다섯 항구를 개항했다. 조선은 1876년 일본의 무력적 강요에 의해 강화도조약을 맺고 부산(1876), 원산(1880), 인천(1883) 세 항구를 개항했다. 당시 동양 3국이 겪은 외압의 차이는 이후 근대 제국, 반식민지, 식민지라는 각각의 길을 가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근대의 길목에서 인천은 톈진과 요코하마와 같이 수도에 이르는 인후(咽喉)의 요지로서 개항됐다. 조선 개항을 전후해서 인천과 일본, 그리고 중국은 어떤 만남을 가졌던가? 그것은 운양호사건으로 개항과 함께 근대 불평등 조약의 단초가 됐던  ‘조일수호조규’(1876)를 강화도 연무당에서 체결하면서였다. 조선은 개항을 통해 청·일 및 서구열강과 교류하게 됐지만 불평등조약의 체결로 인해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이 본격화됐다. 그로부터 5년 후 중국과 일본을 배후에 둔 국내 정치계의 갈등은 임오군란을 초래했고 그 배상문제를 두고 인천에서 이른바 제물포조약을 체결했다(1882). 

조선에서 청·일 양국의 정치·경제적 대립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됐다. 1894년 5월 갑오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정부는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고, 일본 역시 조선에 대한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 당시 인천항은 일본군의 상륙거점이자 전쟁물자 보급기지로서 활용됐다. 갑오농민전쟁이 진압되자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조선을 둘러싼 주도권 쟁탈로 긴박해지더니 청일전쟁이 시작됐다(1894). 10여 개월에 걸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인천 청국조계의 중국인들은 본국으로 귀환하는 등 경제적 활동이 극도로 위축됐고 반대로 일본인들의 경제적 진출과 인구가 급등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청일전쟁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려 했지만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의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가 새롭게 일본의 지배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서 등장했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일본과 대립했고, 인천은 바로 ‘제물포해전’이라 불리는 러일전쟁의 출발점이 됐다. 일본은 승리한 2월 9일을  ‘인천의날’로 기념했다. 

주지하다시피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곧 인천의 근대사이다. 인천은 동아시아에서 발발했던 역사적 사실과 사건의 중심에 있었음을 지난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과연 어떤 인식과 역할을 했는지 되돌아 봐야 한다. 역사 본질은 교훈이다. 결코 과거 어리석은 경험을 오늘에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125년 전 역사적 갈등이 아직도 공존하는 동아시아 특히, 일본과의 관계는 아는 만큼 보이는 역사로부터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일(知日)이 곧 극일(克日)하는 방법임을 깊이 통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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