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에 ‘예조’란 한 터럭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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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에 ‘예조’란 한 터럭도 없다
김락기 시조시인/객원논설위원
  • 기호일보
  • 승인 2019.09.25
  • 11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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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락기 시조시인
김락기 시조시인

늘 함께하면서도 잘 모르고 지내는 게 있다. 바로 ‘한글’의 품격이다. 명색이 이 나라 글쟁이랍시고 우리 시가를 수월찮이 지어왔지만 한글의 참된 값어치를 지나친 지 오래 같다. 틀림없이 아귀가 딱 들어맞는 시어, 그것도 문득 순 한글 토속어가 떠올라 낚아챌 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분초를 다투는 이 급변 세상에, 한순간 온몸을 타고내리는 카타르시스는 곧 한글 때문이란 걸 근년에야 새삼 더 깨닫는다. 한글의 본이름인 ‘훈민정음’의 위대성을 나는 1446년 반포 당시 정인지의 말을 빌려 이 글 제목에 넣어보았다. 그는 「훈민정음해례본」 후서에서 ‘예조’라는 낯선 낱말을 역이용해 우리 언어생활과 정음의 완벽한 조화를 표현했다. 

예조는 방예원조(方예圓鑿)의 준말로서 사물이 서로 맞지 않음을 말한다. 훈민정음 28자면 우리말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 말이라도 거의 다 써낼 수 있으니 예조란 아예 발붙일 틈이 없다.

요즘 세계 언어는 3천여 개, 사용되는 문자는 70개쯤이라고 한다. 특히, 한글에 대해서는 각국 언어학자들이 마치 칭송 경쟁이라도 벌이듯 인류 최고의 문자라 한다. 언제쯤인가 이 뜨고 있는 한글의 전신, 그 훈민정음이 어찌어찌 내게 궁금증을 싣고 다가왔다. 2008년에 알려진 훈민정음해례본(상주본)의 분쟁 보도나 훈민정음 창제원리 강의를 듣게 되면서 더욱 가까워진 것 같다. 국립한글박물관을 다시 찾거나 영화 ‘말모이’나 ‘나랏말싸미’도 감상하게 된다. 드디어 「훈민정음해례본(안동본)」을 직접 읽어 보고서야 이 국보와의 뒤늦은 만남을 적이 자탄했다.

우선 그 자모 속에는 인류의 원초적 고향의식이 깔려 있어 나절로 무릎을 쳤다. 고향처럼 정겨운 문자가 곧 한글이라고 느낄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흔히 돌아갔다고 한다. 어디로 가는가. 태어나기 전에 살던 곳, 이를테면 저 하늘로 북두칠성 같은 별자리로 돌아간다고 풍속으로 들어 왔다. 그 이름이 천국이든 극락이든 대라천이든 저 대우주(great universe)라는 고향하늘의 일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에 이 삶도 그저 평안케 지낸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고인돌이나 무덤에다 별자리, 즉 천문도를 수도 없이 그렸다. 그중 평안도 덕화리 2호 고분의 천장에 그려진 28수 고구려 천문도가 있다. 동양에서는 하늘을 크게 28개의 별자리로 나눠 관측하기도 했다. 훈민정음 28자는 바로 이 28수 천문도를 바탕으로 하여 탄생됐다. 한글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쓸 수 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한글은 하늘이라는 대우주에서 태어난 글자이기에 대우주 품안의 삼라만상에서 나는 모든 소리와 일심동체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자모를 만들 때 한 치의 허점도 없는 정교한 논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자음에서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가획할 경우를 보자. 가로 선을 하나 더 그을 것인지(사례:ㄷ→ㅌ), 아니면 가운뎃점을 하나 더 찍을 것인지(사례:ㅈ→ㅊ)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고려를 했다는 점이다. 이는 그 자모가 천문도의 배속 영역에서 음도(ㅌ)냐 양도(ㅊ)냐에 따라 달리한 것이다. 가획 ‘가운뎃점’(·)은 하늘이며 양도에 해당되고, 가획 ‘가로 선’(ㅡ)은 땅이며 음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만 봐도 한글은 세종이 주도면밀하게 창제한 완벽체 글자임을 알 수 있다. 11자의 모음과 17자의 자음 배열 순서에도 지금과 달리 하도낙서와 음양오행의 순행 원리가 들어 있다. 심지어 말소리에는 사성(四聲)과 청탁까지 섬세히 그려졌다. 정인지의 표현대로 ‘천지만물의 이치가 모두 갖춰질 만큼 정음 28자의 쓰임새는 신령스럽다.

이제 저 하늘에 계신 세종이 엷은 미소라도 짓지 않을까 싶다. 어이하여 한글이 탄생된 지 600년이 다 되가는 이즘에야 반재원 훈민정음연구소장이 대왕의 웅숭깊은 뜻을 풀었을까. 천문도에 따른 우주과학적 문자 창제는 절로 사람들을 근원적 고향의식에 잠기게 한다. 세종의 애민과 홍익정신 같은 감동 덩어리가 연이어 곁을 감싼다. 

15세기 창제 당시 유학자들의 극심한 저항 속에 터를 닦고, 500년간의 긴긴 곡절 끝에 전형필이 당시 기와집 11채 값을 지불하고 전해온 1940년 발견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해례본」! 그 숭고한 품격 어디에 예조가 끼어들 수라도 있겠는가. 단시조로 읊는다.

- 정음 28자 -

 
 저 하늘의 별빛 받아
 알알이 영근 자모열매
 
 오백여 년 바람 속에
 넷은 점차 사라졌어
 
 세계화
 갖은 말들이
 다시 오라 보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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