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최원영 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 겸임교수

안데스산맥의 북쪽, 해발 5천900m 높이에 사는 원주민들은 오랫동안 외부의 문명과 결별한 채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을 이끄는 사제들은 점을 쳐서 앞으로 자신의 뒤를 이어 사제로 살아갈 아이의 탄생을 미리 알아내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동굴로 옮겨 키웁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는 사제로 지목된 아이의 성장과정이 소개돼 있습니다. 젖먹이 때는 아이 엄마가 동굴 옆에 머물면서 젖을 먹이지만 그것 외에는 사제들에 의해 양육된다고 해요. 아이는 9년 동안이나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해와 달조차도 보지 못한 채로 소박한 음식만 먹으며 사제들로부터 부족의 신화와 종교의식 등을 배웁니다. 이 기간이 끝나면 아이는 인간 마을로 내려갈지, 아니면 동굴에 남아 배움을 계속할지를 선택할 수 있고, 후자를 선택하면 다시 9년 동안의 동굴생활이 이어집니다. 

저자는 동굴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희미한 빛밖에 없는 동굴 안에서 자기내면의 영성과 대화하는 법, 하늘과 땅의 비밀, 인간세상의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배운다. 그러면서 나무와 산이 어떤 모습이고, 하늘을 나는 동물이 어떻게 생겼으며, 바닷물이 몸에 닿을 때 어떤 느낌일지를 궁금해 한다. 그리고 어둠 속을 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마음이 지어내는 환상을 꿰뚫어보는 투시력이 생긴다."

어둠은 어둠으로만 끝나지는 않는가 봅니다. 자신이 선택한 어둠의 세월이 빛을 볼 수 있는 지혜로 바뀌니까 말입니다. 마침내 18년의 수련이 끝나는 날의 경이로움을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이는 사제 손에 이끌려 시에라산맥의 새벽빛 속으로 나온다. 그때까지 관념과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세상과 만나는 것이다. 그때의 충격, 놀라움과 경이로움, 나뭇잎들의 초록색 수런거림, 바위에 자라는 이끼, 골짜기를 나는 새, 최초로 살에 닿는 햇빛, 온갖 나무와 꽃들의 경외감에 압도돼 아이는 무릎을 꿇고 위대한 신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아이는 대지에 깃든 신성을 평생 간직하게 되고, 부족의 사제로 탄생한다. 그는 부족민에게 그 신성을 일깨우는 일을 하고, 이 세계와 영적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교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제는 마을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신뢰할 수 있을 겁니다. 곧 마을의 ‘어른’이 된 겁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음지를 피하고 양지만을 지향하라고, 어둠을 피하고 밝음만을 추구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양지만을 쫓게 됐고, 여전히 음지에 머물고 있는 약자들을 ‘실패한’ 사람들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원시적인 삶을 고집하는 저들의 삶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알았습니다. 어둠과 밝음, 음지와 양지, 그리고 실패와 성공이 제각각 분리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이었음을요. 

멀쩡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될 수가 있고, 높은 지위에 올라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높고 낮음이나 많고 적음은 똑같은 사람의 다른 모습이었던 겁니다. 어둠이 곧 빛일 수가 있고, 빛이 곧 어둠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양지에 있다고 교만할 필요도 없고, 음지에 있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겠지요. 시소처럼 때가 되면 위치가 바뀔 테니까요. 분명한 것은 사제가 된 아이가 어둠을 선택해서 힘겨운 나날을 보낸 것이 훗날 세상 사람들에게 커다란 희망이 돼 준 것처럼 어둠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씨앗이라는 사실입니다. 

책의 저자는 이렇게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 어둠은 자신에 대해 배우고, 정화하고, 자기를 전체적으로 보는 기회이다. 그게 정신적 고통이 주는 신비이다. (…) 어둠의 시련을 겪지 않은 자는 타인의 어둠을 치료할 수 없다. 상처와 고통은 단순한 지식에서 통찰력 있는 지혜로 옮겨가는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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