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시조시인
김락기 시조시인

한글은 옛 글자를 모방했다면서 왜 창제라 할까.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한글을 새삼 궁리궁리하면서 우리 문자의 비망록을 정탐해본다. 한글의 원이름은 훈민정음이다.

 1940년 안동에서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문살 착상설, 파스파문자 기원설 같은 20여 가지의 창제설이 있었다. 그 해례본 정인지 후서에 ‘자방고전’(字倣古篆)이라는 성어가 나온다. 즉 ‘옛글자를 모방했다’는 말이다. 

 최만리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에도 ‘본고자’(本古字)라 하여 비슷한 말이 나온다. 여기서 ‘古篆=古字’라고 볼 때, 그 ‘옛글자’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한자 전서(篆書)의 획을 땄다는 주장 따위는 이미 설득력을 잃었다. 해례본에는 천지인 삼극원리와 조음기관 모방 창제설이 명쾌히 나와 있다. 

 한데 옛 글자를 본떴다니 희한하다. 나는 앞의 한자 관련 기호포럼에서 문자 단독 창제설을 언급했다. 홀로 무에서 유를 만든 게 아니라, 기왕 세대의 자료를 참작했을 거라고 한 바 있다.

 1443년 한글 창제 당시에도 한자나 이두 외에 세칭 ‘언문’(諺文)이라는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 올린 최만리의 상소문에는 그전 왕조부터 있었던 것을 빌려 쓴 것이 언문이라 했다.

 18세기 신경준의 「언서운해」에도 예부터 세속에서 쓰던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만리뿐 아니라 훈민정음 반포 80여 년 후에 나온 최세진의 「훈몽자회」에는 언문을 27자라 했다. 이를 근거로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이미 민간에는 27자의 언문이 쓰였다고 하는 이도 있다. 박학다식한 불세출의 성군 세종이 이에 1자를 더해 동양천문도와 음양오행에 터 잡고, 삼재지도 및 발성기관을 본떠서 28자 훈민정음을 창조적·체계적으로 정립했다고 보기도 한다.

 언문은 이를테면 세종 이전의 원시 한글이었던 셈이다. 이 언문을 태고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옛글자가 나올 것이다. 최태영은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에서 이를 가림토(加臨土)문자라 했다. 훈민정음 연구가 반재원도 확언했다. 세종이 제왕의 지위에서 당시보다 약 70년 전의 기록인 고려 말 이암의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토문자를 봤을 거라 했다.

 물론 그저 동북방 기마문화 속에 퍼져 있던 소리문자라 한 이도 있다. 근 수십 년간 화제가 돼온 한글의 모태글자 가림토. 근조선 중엽 이맥의 「태백일사」에는 가림다(加臨多)라고 나온다. 여기에 -‘토’나 -‘다’나 모두 ‘땅’이란 뜻이란다. ‘가림’은 ‘가리다’(→분별, 선택)에서 나온 말이라 하니, 가림토문자는 우리말을 분별·선택해 쓰는 이 땅의 글자라고 새겨본다.

 위 두 책에 실린 가림토 38자는 약 4천200년 전 고조선 3세 가륵단군이 삼랑 을보륵에게 명해 지었다고 한다. 사서 인용자료 해석에는 보다 폭넓고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고조선에 언문, 언자 같은 고유어가 있었다고 하나, 남아 있는 문물이 빈약해 아쉬울 뿐이다. 가림토를 언문이라고 볼 때, 당시 문자 생활에서는 이두나 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것 같다. 

 신채호는 상고시절 이두가 국문의 지위에 있었다고 한다. 잃어버린 저 북방 드넓은 옛 땅에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고적·유물을 직접 발굴할 수가 없으니 더 안타깝다.

 가림토문자로 추정되는 고비로는 산청 단속사터 비석(1995년 발견)과 경산 명마산 암각비(2003년 발견) 등이 있다. 1930년대 만주 탁본 고문자는 돌궐문자라고 해 제쳐둘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멀고먼 동방 고구려 땅에 서있는 돌궐비, 가림토와 유사한 그 비의 글자체들은 민족 간 언어의 계통적 영향관계를 살피게 한다. 둬 달 전 일본 DHC 방송에서는 일본인이 한글을 통일시켰다는 혐한 보도가 있었다. 이른바 일본의 고대문자에서 훈민정음이 나왔다는 것인데, 최태영은 가림토의 변형이 그 고대문자(수진전 문자)임을 논문으로 입증했다.

 현행 인도 구자라트 문자는 한글과 흡사하다. 38자 가림토문자는 누천년에 걸쳐 내려오면서 여러 동방문자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결론컨대, 훈민정음은 가림토에서 글자의 꼴만 빌렸을 뿐 28자모 각각의 목숨은 세종이 불어넣은 거였다. 창제원리는 그의 독창적 이론이었으며, 창제 작업도 그의 주도 아래 왕자들이나 공주와 같은 소수 측근의 참여로 이뤄졌다. 사실상 세종의 단독 창제가 통설이다. 정인지가 설의했다. ‘전하 한 사람의 사적인 업적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시조로 찬한다.

 

- 가림토 언문 -

옛날 옛적 저잣거리

아사달에서 말하던 글

잊힐 듯 사라질 듯

명맥마저 끊겨 가다

어둠 속

반딧불이로

세종에게 불 밝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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