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은 "한국 영화 100주년을 맞은 해에 값진 상을 받아 영광"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우리 영화의 시작은 1919년 김도산의 ‘의리적 구토’로 보고 있다. 이 작품이 공개된 10월 27일은 ‘영화의 날’이기도 하다. 

의미 있는 100주년을 맞이해 영화계는 다양한 행사와 회고전을 준비 중이지만 상반기 한국 영화는 볼만한 작품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런 분위기는 여름 극장가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1천만을 찍은 작품은 한 편도 없었으며, 100억 원 이상의 제작비로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도 ‘봉오동 전투’와 ‘엑시트’로 절반에 불과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8월의 한국 영화 관객 수가 2013년 이후 최저 수준이라는 통계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 중에 올 여름 가장 높은 호응을 끌어낸 우리 영화 ‘엑시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장기 취업 준비생 용남은 어머니의 칠순 잔칫날 짝사랑하던 의주와 우연히 만난다. 연회장에서 근무 중인 의주와의 어색한 재회도 잠시, 도심 한복판에서 발생한 의문의 독가스 테러로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상승하는 가스를 피해 더 높은 곳으로 대피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서 산악동아리를 함께 한 용남과 의주는 기지를 발휘해 가족과 주변인의 탈출을 돕는다.

영화 ‘엑시트’는 시놉시스만으로는 익히 봤음직한 재난영화의 루트를 답습하는 듯 보인다. 절체절명의 위협은 결국 주인공의 활약으로 극복된다는 큰 틀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뻔한 장면이나 불필요한 시간 끌기 식의 전개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대를 벗어난 긴장감을 선사한다. 

주인공의 설정 또한 인상적이다. 재난영화에 등장하는 남성 주인공은 대부분 비범한 능력자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영화 속 용남은 우리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아웃사이더였다. 번번이 취업 문턱에서 낙방한 그는 언젠가는 잘 될 거란 동정 어린 인사를 매번 들어야만 했다. 연회장에서 일하는 의주도 부점장이란 높은 직책을 달고 있지만 사실은 오랜 비정규직 알바생에 불과했다. 그렇게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청년들이 취업과는 무관한 능력으로 재능을 발휘한다는 설정은 그저 재미로만 보고 지나칠 수 없는 감정을 갖게 한다. 

여성 주인공 또한 연약하다거나 위기의 상황에 넘어지는 등 뻔한 설정으로 불편한 보호본능을 유발하지 않는다.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재난 극복에 앞장선다. 이렇듯 캐릭터 설정만 보더라도 ‘엑시트’는 식상한 공식을 반복하기보다는 현실에 맞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공감을 높였다. 그 외에도 불필요한 죽음, 신파성 눈물, 키스와 포옹의 엔딩 등 예상 가능한 전개를 과감히 제거한 것도 색다르다. 

관객 수가 영화의 가치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점은 될 수 없지만 2019년 대중이 선택한 ‘극한 직업(1천600만)’, ‘기생충(1천만)’, ‘엑시트(940만)는 기존의 문법을 재생산한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익숙함을 탈피한 신선한 도전이 한국 영화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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