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1876년 조선 개항으로 부산의 초량왜관 33만여㎡(11만 평)는 부산 일본 거류지로 설정됐다. 도래한 일본인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가족을 동반하거나 아내와 딸 등 여자를 데리고 오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그런 연유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1882년 이래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좌부(貸座敷, 가시자시키) 등의 요리점이 속속 들어오면서 이미 매춘이 이뤄지고 있었다. 대좌부는 일본의 독특한 성매매 방식으로, 남녀가 은밀한 행위를 할 수 있는 방을 빌려주는 곳이다. 물론 방뿐 아니라 여성도 돈을 받고 빌려줬기 때문에 오늘날의 윤락업소였다. 

이후 일본인이 급증함에 따라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한 매음행위는 은밀하게 성행해 마침내 묵인·반(半)공인의 상태가 됐다. 독신으로 내한한 일본 남자들의 강한 수요가 있었기에 공급이 따르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각 개항장에는 매음업을 영업으로 하는 일본인 직업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아가 일본 여자보다 한국 여인의 화대가 쌌기 때문에 일본 포주들은 한국 여자도 고용하기 시작했다.

1883년 인천이 개항하면서 일본 외무성은 대좌부 영업을 금지했다. 그 이유는 일본이 남의 나라에서 풍기문란한 영업을 허락했다는 것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면 국가 위신이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천영사는 거류민의 성병 확산과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주둔군에게 안전한 성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합법’적인 유곽 설치가 필요했고 또 인천의 도심 기반시설 즉 해안 매립, 도로 개설, 상수도 시설 등 건설 비용 등을 유흥세로 충당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 

유곽(遊廓)은 17세기 초반 일본의 공창제도(公娼制度)하에서 법적 근거를 갖추고 국가 권력의 허가를 얻어 성매매 영업을 하는 집결지였기 때문에, 이는 곧 조선에서의 공창제도가 법적으로 확립되는 전초 단계였다. 조선에서의 유곽은 1902년 우리나라 최초로 부산 녹정유곽(綠町)이 일본인 거류지역에 산재한 이른바 ‘특별요리점’이라는 업체를 한데 모음으로써 시작됐다. 특별요리점은 대좌부와 같은 유형으로 창기를 고용해 놓고 매음을 희망하는 남자들에게 방(房)과 창기를 함께 제공하는 공간이었는데, 결국 일본인들이 부산에 자리를 잡으면서 일본인 거류지에 설치한 일본식 성매매 업소였던 것이다. 

1902년 12월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인천 부도루 유곽 시설이 허가되기에 이르렀다. 부산의 녹정유곽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소식에 자극받은 일본인들이 공동 출자해서 부도루(敷島樓)라는 유곽을 만든 것이다.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으로 많은 일본 군인, 군속, 어용상인 등이 한국으로 오게 되면서 매매춘업은 대 호황을 맞게 됐다. 유곽 건설의 목적 중 하나가 군인과 남성 노동자들에게 안전하게 성을 제공하는 것이었던 만큼 군부대와 가까운 곳에 유곽을 건설할 필요가 있었고, 또 치안 문제를 고려해도 공사관이나 군부대 주변에 유곽을 만드는 편이 안전했다. 

1929년 인천에는 부도루 외에 송산루, 일력루 등 점포 9개가 성업 중이었다. 그러나 업소가 하나둘 늘어나자 임질, 매독 등 소위 화류병이 순식간에 번져나가기도 했기 때문에 유곽에는 그 구내에 성병진료소를 설치해야만 했다. 1930년대 초반 세계적인 대공황의 여파로 전 조선이 불황에 허덕일 때도 인천은 미두꾼과 정미업자들로 인해 유곽에서 만큼은 돈이 흘러 넘쳤다 한다.

일제강점기 여성운동계, 사회운동계에서는 여성을 비인간화시키는 봉건적 유제인 공창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유곽을 직접 찾아 실태를 조사하고 구제시설 설치를 도모하며 실업 여성의 구제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계 문제 해결을 위해 진력했지만 결과적으로 공창 폐지까지는 이끌어내지 못했다. 당시 교육과 취업에서 소외돼 있었던 여성들에게 젠더 및 민족 차별 그리고 봉건적 유제는 그들을 더욱 고립, 통제하게 만든 구조적 요인이었다. 최근 인천 옐로하우스가 정비되면서 그간의 사연들을 사진 기록으로 담은 책자가 발간됐다. 지난 시절 우리의 흑역사가 그 질곡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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