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
손장원 인천재능대학교 교수

높이 솟은 목욕탕 굴뚝은 고층 건물이 많지 않던 시절 도시의 랜드마크였다. 목욕탕에 갈 때가 지났음을 알리는 무언의 압박으로 작용하던 목욕탕 굴뚝이 목욕탕과 함께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어느 새 도시의 화석이 돼 버린 공중목욕탕은 개항과 함께 일본에서 도래한 근대문물이다. 여러 사람이 공중탕에 모여 함께 목욕하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질적인 생활방식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낯선 문화였다.

개항 후 30여 년이 지난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자연스럽게 목욕탕을 드나들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그들이 세운 목욕탕을 함께 사용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다. 

목욕탕을 찾는 한국인이 늘어났지만 1920년대 초반 우리나라 사람들이 목욕할 수 있었던 목욕탕은 인천에 하나밖에 없었다. 1923년 11월 경동에 목욕탕이 세워져 두 개가 됐어도 여전히 부족했다. 1931년 12월 일본인 사업가 노구찌(野口文一)가 한국인 전용 목욕탕 건립을 위해 1만 원을 인천부에 기부했다. 노구찌가 정확히 어떤 의도로 거금을 내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기부금이 한국인의 위생 향상에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인천부는 노구찌의 기부금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의 중심지이던 신화수리 285, 286번지(당시 지번, 현재 동구 화도진로 102번길 11)를 건립 장소로 정하고 1932년 11월 공사에 착수해 12월 28일 완공했다. 다음 해 1월 19일 오전 11시에 공설욕장에서 거행된 개장식에는 노구찌 유족이 초대됐다. 목욕탕은 박영섭이 운영을 맡아 19일, 20일 무료 개방을 거쳐 21일부터 대인 3전, 소인 1전의 요금으로 정식 개장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공설욕장의 초기 운영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개업 후 1개월간 운영실적이 설 대목이 있었음에도 일평균 170~180명(소인이 60%가량)에 불과해 영업 결손이 컸다. 

박영섭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이발업 겸업을 인천부에 요청해 인천지역 최저 요금으로 이발업을 겸업하게 된다. 이후 몇 차례 목욕요금이 인상돼 1934년에는 대인 4전, 소인 3전, 1940년에는 대인 8전이 됐다.

해방 후에도 공설목욕탕은 영업을 계속했고, 1959년까지도 원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목욕탕 건물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은 1972년 무렵으로 보인다. 외벽과 굴뚝 정도만 남기는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이뤄졌다. 목욕탕 옆에 있던 이발소가 있던 자리에는 2층 건물이 들어섰고 목욕탕 뒤편에도 건물을 새로 지었다.

그런데 인천 공설목욕탕이 화수화평 재개발사업 대상지에 포함돼 있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인천 공설목욕탕은 지은 지 87년 된 건물이자 일제강점기 인천에 세워진 목욕탕 가운데 현존 유일의 목욕탕이다.

화수동 일대는 조선 정부가 개항을 준비하기 세운 화도진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된 지역으로 오랫동안 서민들의 삶의 무대이던 뜻깊은 장소이다. 공설목욕탕이 세워진 이유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밀집 거주지였기 때문이다.

역사문화유적이 재개발로 소멸되는 일은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대규모 재개발사업은 도시에 축적된 역사문화 환경을 한순간에 변모시켜 역사의 단절을 초래하는 비문화적 개발행위이다. 이미 언론에 보도된 일꾼교회, 화도교회와 함께 인천 공설목욕탕도 함께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이 있어야 한다. 또한 사업 계획상 복지시설과 종교시설이 들어설 예정인 곳이 화도진의 정확한 위치이므로 이를 알릴 수 있는 방안도 함께 모색해 지역의 역사문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마침 인천도시역사관이 사라져가는 목욕탕을 주제로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다. 11월 1일 개막될 예정인 이 전시회의 제목은 ‘동네목욕탕 - 목욕합니다’이다. 이를 계기로 공중목욕탕을 새롭게 인식하고, 인천 공설목욕탕을 보존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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