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일본의 경제보복이 시작됐을 때 나름 기대감도 있었다. ‘끓는 물 속 개구리 같은 무기력함’보다 ‘위기 상황에서 발산되는 결기’가 오히려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위협요인과 자극이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미꾸라지-메기효과’는 이미 입증된 경영 이론이다. 당시 대통령은 산업 현장을 누비며 연일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각 부처도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응하겠다며 소재·부품·장비 관련 규제개선과 정책지원 방안을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환경부는 화학물질등록·관리법 시행령을 개정해 인허가 기간을 단축하기로, 기획재정부는 일본 수출 규제를 대체할 수입품의 관세 부담을 경감하기로 약속했다. 국토부는 수도권 산업단지 내 우선 입주권을 주겠다고 했고, 산업통상자원부는 일본 이외의 국가로부터 기술 도입을 촉진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 홍일표 의원에 따르면 정부가 이러한 대책들을 발표한 지 100일이 지났음에도, 지금까지 혜택을 받은 민간기업은 사실상 한 곳도 없다고 한다.

화려한 립서비스와 급조된 탁상행정으로 무의미한 대책들을 그럴듯하게 포장했던 것 아닌가 싶다. 정말로 경제 전쟁까지 끌고갈 생각이었다면, 단기적으로 예상되는 피해와 대응책만큼은 미리 꼼꼼하게 마련하는 것이 상식이다. 

정부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오히려 기업들에게 그동안 뭘 했느냐고 다그치는 식이었다. 물론 기업들 입장에서 ‘경제 극일’은 반드시 넘어야 할 큰 과제가 틀림없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대일 전체 무역적자(2018년 241억 달러)의 93%가 소재·부품·장비 관련 종목인데, 그 적자폭이 갈수록 심화(2001년 128억 달러에서 2018년 224억 달러)되고 있다. 미·중·일·EU 중에서 20년 가깝게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도 일본이 유일하다. 따라서 ‘국산화 및 수입선 다변화’는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위험 분산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추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정부의 무책임, 경제적 무기력, 경직적 외교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기업을 정치·외교의 인질로 삼는 구태와 폐단도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한다. 진정한 경제 극일은 정치가 경제를 위해 다시 태어날 때 비로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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