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 소장

‘구차(苟且)하다’는 말처럼 한·중·일 3국의 해석이 다른 말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한국어사전은 ‘살림살이가 몹시 가난하다’가 맨 앞줄에 있고, 중국어사전은 ‘그럭저럭 되는 대로 한다’고 돼 있다. 일본어사전은 ‘일시적이다’ 얼핏 생각하면 나름 서로 통하는 바가 있을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박지원이 병풍에 써놓은 여덟 자를 보면 그 차이가 보다 분명해진다. ―인순고식(因循姑息) 구차미봉(苟且彌縫), 풀이하자면 해오던 그대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임시변통하면서 문제를 어설프게 덮어두면 세상 모든 일이 무너진다고 경계했던 것이다. 

요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무엇이 원칙인지, 무엇이 거짓이고 진실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모두들 진영으로 나뉘어 미쳐버린 게 아닌가 할 정도다. 나 자신 완전히 윤리적 패닉 상태"라고 토로한 진모 교수의 심정이 대다수의 생각을 대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구차스러운 찬성과 반대가 하향평준화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중국인들에게 가장 화제를 많이 모으고 있는 신기란(申紀蘭)의 "나는 구차스럽게 살지 않았다"는 말은 되새겨 볼 만하다. 신기란은 올해 나이 90세. 이번 중국 건국 70주년에 최고의 영예인 ‘공화국 훈장’을 처음으로 받아 관심을 끌었고, 중국의회에 해당하는 전국인민대표회의의 제1기(1954년) 이래 지금까지 대표가 된 유일한 인물이라는 데서 화제가 됐다. 더하여 고향 산시성에서 공산당 간부에 임명되고 30년간 월급을 한 푼도 수령하지 않은 데다 당연히 주어지는 관용 승용차를 거절하고 버스를 이용했으며 출장을 가면 가장 싼 여관, 가장 싼 음식을 찾았다. 마오쩌둥 이래 역대 중국의 지도자들이 앞 다투어 신기란을 만나 격려하고 칭송을 아끼지 않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의 발언이 나온 까닭은 다른 데 있었다. 70여 년간 전국인민대표회의에서 벌어진 모든 투표 과정에서 찬성표를 던진 것에서 비롯됐다. 수천만 명을 아사시킨 대약진운동, 중국 대륙을 온통 휘저어 놓은 문화대혁명에도 찬성표를 던졌고 이를 청산하는 데도 찬성표를 던졌다. 한쪽에서 세월이 변해도 오로지 공산당의 입장만 지지한 것이 대단하다는 칭송도 했으나 다른 한쪽에서는 자기 성찰 없는 거수기에 불과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논란. 국민을 우롱하고 속이는 정치 행위에 대해서까지 찬성한다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고 진영 논리에 갇혀 있었다는 비난은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신기란은 이에 대해 ‘구차하지 않았다’고 한마디 했다. 다소 장황하게 중국인 신기란을 얘기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모두가 보다 신중해지고 어떤 예단과도 거리를 두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우리가 직면한 전례 없는 프레임의 강요(?)는 상상계에서 끼리끼리 그리는 그림 속으로 서로를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안과 밖, 위와 아래가 뒤집힐 정도를 넘어서 아예 안과 밖, 위와 아래가 중간 짝짓기를 하고 있다 자기 불안이 반영된 ‘진실 조급증’ 그대로다. 

이제 조금씩 서로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확정할 수 없는 진실에 대한 물음표도 가슴속에 담아 두지 말고 꺼내야 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아픈 과거를 소환해 늪에 빠진 공동체를 구출해야 한다.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숨을 고르자. 

서초동과 광화문의 촛불시위에서 참가자 수를 놓고서 주최 측과 경찰, 반대 진영의 참석자 숫자 논쟁을 예를 들어 보자. 본래 숫자 세기는 군중을 추적하고 통제하려는 욕망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참석자 숫자를 정확하게 세지 못 해서 집회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도 아니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참석자 수효에 대한 추산 차이는 사람 수효를 세는 과학적 기법의 부재가 아니라 시민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정치적 역량의 부재일 뿐 아닌가. 10만이든 200만이든 시민을 거리로 나오게 만든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따져보고 서로를 협상의 파트너로 여겨 법과 제도를 바꾸어 시민의 마음부터 다독이는 일에 과감히 나서야 하는 힘 있는 여야 정치인의 구차스럽지 않는 자세가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라는 걸 누가 모를까. 구차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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