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은 인천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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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 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이 부는 날에는 길가 가로수 은행들이 후두두 떨어진다. 은행들이 탱글탱글하게 황색 껍질에 싸여 있다가 나뭇가지에서 보도 블록 위로 떨어지면 행인의 발끝에 닿아 노란색의 중간 껍질도 벗겨지고 부서지고 만다. 촘촘하게 땅바닥에 널려 있으면 피해 가려 내딛는 발자국과 날 좀 보소 하고 버티는 은행을 자주 본다. 은행나무 열매의 특유한 냄새로 꺼리며 피하려고 하지만 지나가다 보면 밟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곰팡이와 벌레에 강하고 도심의 대기에도 강하니 가로수로 많이 쓰인다. 운치 있게 산자락이나 시골 마당에 있다면 가을 수확의 기쁨일 텐데, 깊은 가을이 오면 노란 물이 드는 은행잎은 겨울 길목에 첫 손님처럼 반갑다. 

지난 90년대 은행 창구를 이용하는 고객들은 번호표를 뽑아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시간을 마냥 흘려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무인 현금자동인출기(ATM) 도입은 획기적이었다. 같은 시각 시작해 기다려도 기계 앞에 서면 줄이 금세 줄어들지만, 창구 앞에는 시간을 더 기다리는 것 같다. 세금 마감일이거나 점심 시간에 이용하는 고객들 또는 특정 기간이 정해지는 날이면 은행 일은 한두 시간씩 기다려야 마쳤다. 

돈을 찾을 땐 도장과 통장이 꼭 필요했다. 그러나 기계는 은행 카드나 통장 중 하나만 있어도 해결이 됐고 은행 방문에 일 처리와 시간에 대한 고민거리를 줄여 줬다. 바쁜 현대인에게는 반가움이었다. 기계 앞에서 돈을 찾으며 신문물의 대열에 승선한 세대로 우쭐했었다. 길게 늘어선 줄이 줄어들고 차례가 되었기에 서툴지만, 신경 쓰며 눌러 진행을 했는데 번번이 잔액 부족이란다. 내심 앞사람들이 계속해서 돈을 찾아갔으니 기계에 돈이 없어 일어나는 사고로 생각하고 서 있는 청원 직원에게 저 기계가 돈이 없다고 한다며 봐 달라고 부탁하고 은행 문을 나섰다. 나중에 알았지만, 사용법을 몰라서 돈이 나오지 않았던 것을 기계에 대해 오해를 했다. 개인 비밀번호 오류, 통장 잔액 부족, 통장 정리 안 됨 등으로 사용 제한이 있던 것이다. 

무인 시대는 점점 늘어난다. 마침 점심 때라서 음식매장을 들어섰다. ‘지금은 셀프 오더 타임 무인 주문기를 이용해 주세요’ 라는 안내 모니터를 봤다. 직원과 얼굴을 보며 주문하면 쉬웠던 일인데 무인 주문기 앞에 서니 분주한 모니터의 변화로 주문 음식은 보이는데 누름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는다. 선택해야 주문이 들어가고 음식을 받아 갈 수 있는데 잠시 머뭇거리게 만든다. 식당가, 극장가, 은행가, 지하철 역사 가맹점 등 무인 주문기를 설치해 우리는 시간 절약이란 편리한 세상을 살아간다. 

서로가 얼굴을 보고 말하는 대화의 테두리를 벗어난 듯 우리는 묵언 수행을 하듯 살고 있다. 수다는 모니터를 통해 문자로 대신하고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묵언이다. 가끔 말을 잃어 버리진 않았나 스스로 되뇌여 본다. 변화하는 세상에 빠르게 적응하며 문화를 받아들여 흡수하고 생활을 해 가는 것이 지금 세대다.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섞이어 가는 세대다. 그래서 변화하는 세대는 인공지능(AI)과 대화를 나눈다.

인간이 가진 지적 능력을 컴퓨터를 통해 누려 보려는 기술이 변화하는 세대들의 대화 상대다. 상대방의 질문에 응대하며 저장된 사고의 조합을 적절하게 연결해 상대를 배려하며 대화에 정도를 보인다. 인공지능에 단순 노동부터 어렵게 외워야 하는 법률이나 산술학적 계산 그리고 광대한 분량의 통계 등을 맡긴다. 사람은 그만큼 편리함을 누리며 살 것이다. 그럼 변화하는 시대에 사는 변화의 사람은 어디 줄에 서야 할지를 대화 상대에게 물어본다. 

< 터 >

부서져 휘어진 철제가/ 집터 더미에 누웠다/ 나무와 잔디가/지층 흔드는 굉음 소리로 뭉개지는 날/ 도시로 간 일상은/ 지붕 위에 지붕/ 발아래 또 발로/ 땅따먹기 어린 시절보다/ 좁은 공간을 공유하며 나날을 산다/ 들어부은 콘크리트 바닥에/ 흙의 자취는 서러운 양 감추고/ 늘어가는 담벼락의/ 그늘이 빛을 쫓는다. - 필자의 시집 「동인천」 중에서 -

▶필자 : 1994년 『순수문학』신인상/시집 :『하루 안에 있는 그대』(1998), 『동인천』(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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