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인천항의 제물량은 성창포와 영종도 사이의 좁은 수로(水路)를 말하는데, 이 수로는 지방에서 도성(都城)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목으로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사신을 태운 선박이 영종도에 머물렀다가 개경으로 향하기도 했고, 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조운선(漕運船)들의 수로로 활용됐다. 그러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제물량에 수군(水軍) 만호영(萬戶營)을 설치해 왜구의 침탈 방어와 조운선을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병력으로는 대맹선(大猛船) 2척, 중맹선 1척, 소맹선 1척, 무군(無軍)소맹선 1척이 배치돼 있었는데, 대맹선은 매 1척 수군 80인, 중맹선은 매 1척에 수군 60인, 소맹선은 매 1척에 수군 30인이었으니 대략 250여 명의 수군이 상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대맹선은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데도 이용하기 위하여 개발된 배로, 800석의 곡물을 운반할 수 있었다 하니 인천항은 예비의 무군대맹선까지 합해 1천600여 석을 운반할 수 있었던 서해안 제일의 병참 기지항이었다. 

 조선시대 경기도의 해방(海防)은 ‘남양’과 ‘교동’에서 책임을 지고 ‘왜구’를 근해(近海)에서 격퇴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방어체제는 국가의 보장지처’(保藏之處)인 ‘강화도’ 중심으로 변환되었는데, 남양의 영종진이 당시 자연도라는 섬으로 이설되면서 자연도(영종진)는 교동과 함께 강화도의 좌우익이 됐다. 이와 같은 군사 전략 수정으로 인천의 제물진(濟物鎭)과 안산의 초지진(草芝鎭) 등이 강화도로 이설(移設)하게 됐는데, 이때부터 인천은 개항이 될 때까지 ‘자연 그대로의 항구’로 정체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1883년 인천항이 갖는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개항지가 되었던 것은 그간 인천이 갖는 군항과 상업항으로서의 가치를 재확인한 결과였다. 그 결과 외국 상인들과 선박이 날로 늘어나 정기 운항선이 개설됐고, 또 마포까지 가는 기선이 매일 운항돼 인천∼경성 간 수로교통 역할을 맡고 있었다. 1894년 1월 방곡령(防穀令)이 해제되자 미곡 반출의 창구로서 더욱 중요시됐고 1899년 경인철도 개통으로 무역액은 전국 수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인천항은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 이후 물동량에서나 항만시설에서도 부산항에 추월당하고 있었다. 

급기야 만조 간조를 가리지 않고 언제나 대소선박이 입항할 수 있는 도크(船渠)를 요구하는 소리가 실행되기에 이르렀다. 축항 계획은 ‘2중갑문식 선거’ 구축이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기공식은 1911년 6월 11일 거행되고 4천500t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축항이 1918년 10월 27일 완공됐다. 당시 동양에서 하나뿐인 ‘도크’로 인천의 자랑거리였다. 1923년 월미도 제방축조 공사가 끝나고, 1929년부터 1934년까지 6개년 계획으로 매축 확장 공사가 완성됐다. 이어 경인공업지대를 병참기지화한 일제는 1936년부터 1941년에 이르는 6개년 사업으로 인천 북항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북항 공사는 당초 계획을 변경 330만5785㎡에 달하는 공업지대를 조성한다는 의욕을 보였지만 태평양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대략 30%의 공정을 보인 가운데 중단됐다. 

한국전쟁으로 항만시설이 거의 파괴돼 하역능력을 거의 상실했지만,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한강의 기적’을 가져 왔고, 서울의 출입구였던 인천항의 확충문제가 시급히 대두됐다. 기존 도크를 헐고, 새로운 항만 구축은 1966년부터 착공돼 1974년 5월 10일 8년 만에 동양 최대 갑문식 도크로 재탄생했다. 이로써 일본의 오랜 잔재를 말끔히 씻고 우리 기술로 이룩한 세계적인 항만시설을 갖추게 됐던 것이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2015년 인천 송도에 신항을 개장한 인천은 지정학적 특성으로 볼 때 예나 지금이나 해양 관문일 수밖에 없다. 130여 년 전 국제항이었던 역사적 경험으로 명실상부 남북교류의 중심 창구로서 또 한·중·일과 세계 교류의 중심 무대로서 부각될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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