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구(청운대학교 영어과 교수)
김상구(청운대학교 영어과 교수)

프랑스 사회학자 귀스타브 드 보몽은 감자 대기근(大飢饉,1845∼1852)을 겪고 있던 아일랜드를 방문하고, 이들이 쇠사슬에 감긴 흑인들보다 더 처참했노라고 술회(述懷)했다. 아일랜드에 감자 역병이 돌자,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100여만 명이 먹을 것을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났다. 영국의 식민지나 그 영향력 하에 800여년을 지내 왔기에 그들은(아일리쉬 Irish) 스스로 자립할 능력도 없어 보였다. 

 영국인들은 이들을 ‘하얀 검둥이’이라 비하하였고, 굶어죽는 그들을 못 본체 했다. 스스로도 아일랜드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나라’라고 여겼다. 

 이런 그들이 우여곡절 끝에 나라를 세웠고, 지금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8만4천 달러로 영국의 4만6천 달러를 앞질렀다. 국민총소득(GNI)도 영국보다 높다. 영국이 브렉시트(Brexit)로 국제사회에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아일랜드는 구글, 애플같은 글로벌 기업 유럽지사들을 낮은 법인세(12.5%)로 아일랜드에 끌어들었다. 

 아일랜드가 잘살게 되자 영국도 그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아일리쉬들도 영국을 과거와는 다르게 바라본다. 피해의식에 젖어있던 그들은 뭔가가 잘 안 되기만 해도 영국 탓으로 돌렸다. 

 1950년대 어느 아일랜드 작가는 "내가 연애를 못하는 것도 영국 놈들 탓‘이라고 투덜댔다고 한다. 원념(怨念)에 젖어 있던 그들의 모습은 해방 후, 술과 놀음으로 세월을 보냈던 우리 모습과 흡사하다. 

 아일랜드가 낳은 20세기 최고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에서 아일리쉬들의 피폐한 정신세계를 ‘마비(paralysis)’로 규정하고 그들의 추한 모습을 핍진성(逼眞性) 있게 묘사했다. 거울에 비춰진 자신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그렇게 살아가지 마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여 정치문제를 나누다가 대판 싸우고 헤어지는 가족, 술에 취해 집에 들어와 아내와 아이를 구타하는 술주정뱅이, 뭔가가 잘 안 풀리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여기에 등장한다. 아일리쉬들의 성격은 한국 사람들의 성격과 많이 닮아 있다. 

 방탄 소년단(BTS)의 공연을 보려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밤을 세워가며 표를 구매하는 것은 BTS의 노래에 그들이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켈트족의 문화에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한(恨)’같은 것이 있다. 아일랜드 극작가 J.M. 싱(Synge)의 『바다로 달려간 사람들』에도 바다에 남편과 아들을 잃고 한 많게 살아가는 여인의 눈물이 스며들어 있다. 제임스 조이스를 비롯한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조너선 스위프트 등의 아일랜드 문학가들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듯싶다. 아일랜드는 EU의 IT강국이며 잘사는 나라로 우뚝 섰다. 

 아일리쉬들은 이제, 조이스가 한심하게 여겼던 정신적 ‘마비’의 상태에 있지 않다. 그들은 철지난 좌·우파 진영논리, 진보·보수의 이데올로기로 더블린 거리에 모여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는다. 2011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일랜드를 국빈 방분하여 아일랜드 대기근 때 도와주지 못했던 과거사에 사과했다. 아일랜드의 경제력이 영국과 동등해 진 후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영국의 브렉시트라는 ‘뻘짓’ 덕분에 북아일랜드와 통일의 전망도 열어 놓고 있다. 

 우리도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여 연간 수출액(6,284억달러)이 일본(7,431억달러)의 84.5%에 접근했지만 아직 일본을 앞서지는 못했다. 아일랜드는 글로벌 환경에 적응할 줄 아는 과감한 정치, 경제정책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편협한 민족주의와 정신적 ‘마비’에서 벗어났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복수는 죽창 들고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방문하지 않고, 불매운동만 벌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 ‘마비’를 극복하고 일본을 여러모로 앞서는 일이다. 그럴 때 일본은 진정한 사과를 할 것이고 통일도 다가올 수 있다. 상대방을 향한 손가락질을 내려놓고 경제적, 정신적으로 ‘명품처럼’ 잘사는 것이 멋진 복수다.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KIHOILBO

저작권자 © 기호일보 - 아침을 여는 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