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학교 현장은 하루하루가 갈등의 용광로이다. 학교 교육이 붕괴될 만큼 온갖 요소를 망라한다. 질투와 증오(민원), 잠자기와 불복종(교실 붕괴), 아픔과 상처(스쿨미투), 소란과 폭력(학교폭력), 탐색과 비밀(극한 경쟁) 등 인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크고 작은 양상이 작은 어른들로부터 파생하고 있다. 왜 작은 어른인가? 단지 형식적으로 미성년자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는 어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반장 선거나 회장 선거를 보면 기성세대의 모든 수단이 등장한다.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가 이렇게 애늙은이를 만들었을까? 부끄럽게도 어른들, 학교의 기성세대 집단들이다. 학생을 자신들의 눈높이로 보고 모든 교육 활동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학생 눈높이로 맞춤식 교육을 실행하기다.

학교에선 과거 우등생이었던 교사집단과 다양한 특성을 가진 럭비공 같은 청소년 집단이 함께 생활한다. 교사 집단은 대부분 공부와 생활면에서 모범생으로 지나온 이들이 많다. 전직 미국 대통령도 수차례 ‘한국 교육을 보라’며 부러워했던 것이 높은 교육열과 수준 높은 교사 집단이었다. 이런 집단이 오늘날 학생들을 기대만큼 잘 교육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오히려 그로 인해 갈등과 문제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교사는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실패한다. 그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서 학생을 그들의 눈높이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 현장은 ‘스쿨미투’와 같은 방식으로 수많은 심리적 갈등이 혼재하고 청소년들의 눈에 비친 교사는 한마디로 ‘꼰대’로 군림한다. 

교사가 변신을 시도해도 근본이 달라지지 않는 것은 ‘청바지를 입은 꼰대’로 남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여전히 갈등은 심화될 뿐이다. 생활지도 문제 대부분은 이처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해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이로써 양자는 무수한 상처를 주고받는다. 이젠 교사들이 학생들로부터 패자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각종 소송 사건에 연루되고 학생들의 대자보에 등장하고 민원의 대상이 된다. 학부모는 급기야 철밥통 퇴치를 부르짖으며 교사에 대한 질투와 증오의 상황까지 왔다. 

교사가 학생 지도에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례를 참고하자. 미국 인디애나주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브라이언이라는 15세 소년이 뇌종양으로 방사선 치료와 약물 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 그는 놀림감이 될까봐 학교에 나가기를 꺼렸다. 학급의 급우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자발적으로 그를 돕기 위해 나섰다. 그 방법은 학급 친구 모두가 삭발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이 빠진 친구가 외톨이가 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였다. 이 이야기는 신문에 보도돼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우정인가? 이런 눈높이를 기성세대는 죽었다 깨어나도 착상하기가 쉽지 않다. 왜? 항상 자신들의 눈높이로 자신들 편리대로 교육을 구안하기 때문이다. 

학생과 만남은 최대한 눈높이를 맞춰 존중하는 마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상대방의 존재에 대한 이런 존중은 상호간의 거부감을 낮춰 줄 뿐만 아니라 대화가 원만하게 이뤄지도록 영향을 미친다. 또한 존중은 산소 같은 생각들을 자신과 상대방에게 전달해 준다. 교사나 어른이 학생에게 존중의 옷을 입히지 않으면서 예쁘고 바른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환대하고 참여시키며 존중해주는 시간들이 지속되면 아이들의 태도도 틀림없이 달라진다. 단 많은 시간을 인내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선택은 아이들의 몫이다. 부모나 교사는 조바심을 경계하기만 하면 된다. 아이는 존중받고 자랄 때 진정한 인격체로 성장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온 마을이 나서서 한 아이를 키웠던 마을공동체의 아름다운 풍속이다. 학생을 눈높이에 맞춰 맞춤식으로 존중하는 것이 갈등으로 불거진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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