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구 인천문인협회이사
황흥구 인천문인협회이사

"커피…" 아내가 부르는 소리다. 요즘 부쩍 잦아졌다. 긴말이 필요 없다. 커피가 먹고 싶으면 빨래를 하다가도, 설거지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불러 댄다. 그러면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신문을 읽다 말고도, 심지어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도 재빠르게 나와 커피를 끓여 아내에게 바친다. 끓인다고 해봐야 일회용 커피를 잔에 붓고 정수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을 부으면 그만이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쓸 일은 아내는 뜨거운 커피를 좋아한다. 조금이라도 뜨겁지 않으면 쓴 약을 먹기라도 하듯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렇기 때문에 뜨거운 물로 한번 헹구어 내고 커피를 쏟아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년퇴직하고 시의원직도 접고 나니 집 안에 있는 날이 많아졌다. 아침마다 커피 생각은 나고 예전처럼 끓여 바치는 사람도 없으니 내 스스로 끓여 먹는 수밖에, 이것은 아내를 위해 한다기보다는 나를 위해 시작한 일이다. 

그것을 눈치 빠른 아내는 다 안다. 사십여 년 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먹은 것이 있다면 아마 커피일 것이다. 우선 출근하면 찾게 되는 것이 커피다. 그렇게 습관처럼 마셔대던 커피를 정년퇴직하고 나니 누가 끓여 주는 사람도 없고 함께 먹을 사람도 없어졌다. 처음엔 아내가 끓여줘 같이 마시기도 했지만, 아침 먹고 제일 한가한 사람은 나였지만 아내는 그때가 제일 바쁘다. 맞벌이 딸애가 맡긴 외손녀를 어린이집에 보내려면 머리 빗기랴, 옷 입혀 보내랴 그렇게 하고 나면 다시 설거지에, 빨래에, 집 안 청소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아내한테 커피까지 끓여 달라고 하는 것이 슬슬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현관문을 들어서는 아내한테 "커피…?" 하고 물었더니 아내 또한 "커피…"하는 것이었다. 이때 내가 마시겠느냐고 물을 때는 끝에 억양이 올라가지만, 아내의 ‘커피’ 억양은 내려간다. 

커피라는 두 글자는 어느 새 묻고, 대답하는 고유명사가 돼 버렸다. 이렇게 해서 지난 일 년가량을 아내와 나는 커피 친구가 되었다. 요즈음은 내가 먼저 커피 억양이 올라가는 횟수보다 아내가 먼저 커피 소리를 내는 일이 많아졌지만 절대 억양이 올라가는 법이 없다. 짧게 끊는 단음으로, 끓여 달라는 소리다. 그때까지 난 참고 있다가 그 소리만 나오면 고맙다는 듯이 주방으로 달려가 찬장을 뒤진다. 아내가 먹고 싶을 때 나도 같이 먹게 되기 때문이다. 커피도 술처럼 혼자는 못 마신다. 묘하게도 둘이 마셔야 쓴맛인지 단맛인지 안다. 사실 아내와 사십여 년 살을 맞대고 살아왔지만 요즘처럼 아내와 같이 커피를 마셔보기는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정년퇴직하고 좋은 것이 생겼다면 아내와의 대화가 부쩍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커피가 없었다면 이마저도 없을 뻔했다. 아내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것이 있다면 서로 일회용 커피믹스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커피믹스도 핑크빛 꽃잎이 박힌 말간 커피 잔에 삼 분의 이가량의 뜨거운 물을 붓고 휘 몇 번 내저으면 약간의 분말이 커피 잔에 묻었을 때 마시면 가장 맛있다. 아내가 화장실에 쪼그리어 앉아 빨래할 때 커피 한 잔을 타서 기다리면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흘러내린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나는 그 옆의 문지방에 걸쳐 앉아 함께 마실 때가 가장 맛있다. 아내가 거실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할 때 허옇게 드러난 가슴 밑에 커피 잔을 슬며시 들이밀면 아내는 이내 허리를 곧추세우고 나는 식탁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그윽하게 쳐다보며 마실 때 가장 맛있다. 

가끔 거실 밖 베란다 탁자에 앉아 해가 지는 석양빛을 바라보며 아내와 함께 마시는 커피 맛은 일품이다. 잘 볶아내고 우려낸 원두커피의 향긋한 내음과 쌉싸래한 맛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간단한 일회용 커피지만 누구와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맛은 다르게 마련이다. 아내가 "커피…"하며 커피 잔을 내려놓는다. 커피를 다 마셨다는 얘기다. 나도 잔 밑바닥에 조금 남은 커피를 냉큼 마시고 빈 커피 잔을 들고 거실 끝에 있는 주방 쪽으로 발을 내디딘다. 뒤통수 뒤로 아내의 "땡큐~" 소리가 어느 때보다 밝게 들린다. 

▶필자 : 1996년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1998년 제1회 공무원문예대전 수필부문 동상, 2010년 수필집 「그 여자네 집」 발간, 전 인천시의회 문화복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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