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강덕우 인천개항장연구소 대표

"중국인이 바다로 건널 수 있는 곳에 어디든지 화교가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현재 전 세계 곳곳에 해외 거주 중국인이 활동하고 있다. 화교(華僑), 화인(華人), 당인(唐人)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는 이들의 본격적인 해외 진출은 대략 당대(唐代) 이후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대의 화교와 직접 관련을 갖는 중국인의 해외 도항(渡航)이 합법적으로 실시된 것은 청나라 때의 베이징 함락 후 맺게 되는 베이징조약(1860년)에 연유한다. 당시 중국인의 해외 도항은 공인됐어도 그것은 거의 남성에 제한된 것이었고, 여자(싱글)의 도항은 사회 관습상 금지돼 있었다. 그 결과 해외의 화교 사회는 남성사회였고 인천 청관의 형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 화교 역사는 1882년 6월 임오군란 당시 조선의 요청에 따라 청국 군대 4천 명을 태운 군함 3척과 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상선 두 척에 40여 명의 상인을 싣고 도착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어 임오군란 직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협약을 맺음으로써 청상(淸商)의 경제적 진출이 본격화됐는데, 갑신정변 등 계속되는 조선 정국의 불안은 서울의 부동산 가격을 폭락시키는 결과로 이어져 중국 상인들이 서울의 상점과 주택을 헐값으로 구입하는 행운을 얻게 됐다고 한다. 인천에 화교가 언제부터 거주하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에 파견됐던 상무위원(商務委員) 진수당(陳樹棠)이 1883년 말부터 이내영(李乃榮)으로 하여금 인천 영사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있었다. 1883년 12월 청국조계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고 1884년 4월 청국조계지가 설정됐다. 초기 현 선린동 일대 1만6천500㎡(5천여 평)에 자리 잡은 청상들은 주로 식료품, 잡화류 수입과 해산물 수출업에 종사했으며, 영국·미국·러시아 등의 함선이 입항하면 식료품·음료수 등을 공급했다. 그 후 동순태(同順泰), 인합동(仁合東), 동화창(東和昌) 등 청나라 거상(巨商)들의 큰 점포가 줄지어 생겨났고 여관, 잡화상, 음식점, 주택들이 빽빽이 들어섰다. 이들은 중국 광둥 출신의 무역상과 산둥 출신의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사부(理事府)’라는 이름의 청국영사관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관청이 있는 동네’라는 뜻에서 ‘청관(淸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한강수로가 열리고 중국과 정기항로가 개설됨에 따라 상하이~인천~서울 간 무역로가 획기적으로 단축됐고, 조선 시장에서 중국 상인의 경쟁력도 그만큼 증대됐다. 인천과 뱃길이 트인 산둥지역에서는 ‘인천은 돈벌이가 잘되는 곳’으로 소문이 번져 많은 산둥인들이 서해를 건너 왔다. 1893년 동순태는 마차회사를 설립해 서울~인천 간 육로 운송 사업에도 뛰어들어 중국제 여객용 마차 40량과 화물용 마차 60량을 투입했다.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서울~인천을 6시간에 주파하는 동순태의 마차는 가장 편리하고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인천 조계지 내의 화상들은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됐다. 한편으로 1898년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둥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 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했는데, 이들도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다. 그래서 인천은 부지불식간 화교들의 근거지가 됐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됐다. 결국 늘어나는 중국인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지금의 동인천역 근처까지 조계를 확장해야 할 정도였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간 화교들은 청일전쟁, 만보산사건, 중일전쟁, 제2차세계대전, 한국전쟁과 중국의 참전, 한국 정부의 배타적 화교정책 등에서 많은 우여곡절과 시련을 받아왔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의 부상과 지구촌 시대를 맞아 청관은 이제 차이나타운으로 재탄생했고 지역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고대 능허대를 통해 중국으로 가는 뱃길의 단초를 열었던 인천은 대중국 교류의 중심도시로서 또 동북아의 거점도시로서 손색이 없다. 원조 다문화사회를 경험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국제성과 포용성을 발휘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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