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연 인천문인협회 회장
김사연 인천문인협회 회장

 지난달 27일 오전 7시, 인천문인협회 회원 40명은 2019년 가을 문학기행 길에 올랐다. 지난 6월 초 충남 천리포수목원으로 봄 문학기행을 간 지 5개월 만의 나들이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꽂는 한낮에만 활동하다가 이른 아침에 거동하니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소름이 돋는 듯한 오한을 체감하며 이런 것을 두고 ‘피부로 느낀다’라고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인천시청 앞 광장은 언제 이렇게 달라졌는지 승용차를 몰고 오는 회원들은 주차장을 찾느라 헤맸다며 한마디씩 푸념을 한다.  우리는 생활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주거지를 떠나 낯선 곳을 찾아 나서는데 우리 주변의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오히려 불편함을 안겨주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말을 탄 계백장군의 동상을 지나 신동엽문학관에 도착한 일행은 시인의 생가 마루에 걸터앉아 문화해설사의 입에 귀를 기울인다. 

신동엽 시인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 동남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부여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가난한 시골 형편으로 상급학교에 진학이 불가능해지자 담임선생님은 배워야 출세한다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마침내 그는 전주사범학교에 진학했으나 1948년, 4학년 때 동맹휴학에 가담해 퇴학을 당한다.

한국전쟁 중, 그는 지역 인텔리라는 이유로 본의 아니게 북한 공산당의 홍보위원 역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참혹했다. 국군이 괴뢰군을 몰아낸 후 그는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하고 처형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대서방을 하던 부친 덕분에 목숨을 건진 그는 공산당의 누명을 벗기 위해 다시 국군에 입대했다. 

1957년, 그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철학과에 합격한 당시의 신여성인 인병선을 책방에서 만나 결혼을 했으며, 생활력이 강한 그녀는 신동엽이 시인의 길로 정진할 수 있도록 평생 내조자 역할을 했다.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수료한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가 당선됐다.  전시실엔 당시 조선일보의 빛바랜 지면이 있었지만, 그 내용은 군데군데 삭제된 채 실렸다고 한다.

농사짓는 쟁기꾼의 대화 속에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었고 이 내용이 검열에 걸리면 작가뿐 아니라 신문사도 피해를 보기 때문에 신문사에서 손을 댄 것이다.

1960년, 교육평론사에 입사한 그는 4·19 학생 의거가 일어나자 「학생혁명시집」을 출판했다. 1961년부터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재직하면서 사회 부조리를 폭로하고, 허구성을 비판하는 시를 창작했다. 그 중엔 아사녀(阿斯女)의 사랑을 그린 장시 ‘아사녀, 동학농민운동을 주제로 한 서사시 ‘금강(錦江)’ 등 강렬한 민중의 저항 의식을 표현했다.

1965년엔 한일협정 비준 반대 문인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1967년엔 4·19혁명 정신을 되새기며, 인간 본연의 삶을 찾기를 희망한 시 ‘껍데기는 가라’를 「52인 시집」에 게재하며 확고한 저항정신을 표현했다. 

<껍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그리하여, 다시/껍데기는 가라./이곳에선,/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가/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할지니//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

그는 요절할 운명을 타고났나보다. 애당초 폐디스토마에 감염된 환자였는데 객혈을 폐결핵으로 오진한 탓으로 엉뚱한 치료제를 복용해 병을 키웠고 결국 1969년 4월, 간암으로 사망했다. 아들의 시신을 부여안은 모친은 "공부를 많이 해야 출세한다고 해 가르쳤더니 40살도 못 채운 채 죽을 수 있느냐?"며 오열했다고 한다.  

그는 간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약 20여 편의 시를 발표했으며, 1975년, 사후 유작을 모아 「신동엽전집」을 간행했다. 주요 작품으로 ‘삼월(三月)’, ‘발’, ‘껍데기는 가라’, ‘주린 땅의 지도원리(指導原理)’, ‘4월은 갈아 엎는 달’, ‘우리가 본 하늘’ 등이 있고, 유작(遺作)으로 통일의 염원을 기원하는 ‘술을 마시고 잔 어젯밤은’ 등이 있다. 

부여는 김종필 전 총리가 태어난 고향으로 보수성이 강한 지역이어서 진보적인 신동엽 시인은 주민들과 군사정권에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사후 1년 후 유족과 친지들에 의해 건립된, ‘산에 언덕에’ 서정시가 새겨진, 그의 시비는 부여와 보령의 경계지 외진 소나무 숲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2003년에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서훈, 2005년엔 문화관광부의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됐다. 요즘은 교과서에 실린 신동엽 시인의 생가를 보기 위해 전국의 학생들과 문인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지난 10월 초, 한국문인협회 300여 전국 대표자들도 부여에서 1박 2일 행사를 치르며 도착하자마자 신동엽문학관부터 들렀다.

요절한 진보 시인이 보수지역 부여의 경제 활성화에 일획을 담당하고 있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문학관 벽에 걸린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는 문구가 방문객의 옷깃을 잡았지만 다음 여정을 위해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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