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의 원조 6번 은행나무
상태바
한류의 원조 6번 은행나무
신효성 국제PEN한국본부 인천지역부회장
  • 기호일보
  • 승인 2019.11.06
  • 11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효성 국제PEN한국본부 인천지역부회장
신효성 국제PEN한국본부 인천지역부회장

장수동 은행나무가 만개를 준비 중이다. 스민 노란빛이 햇살에 투명해지는 꼭대기부터 조근조근 가을색을 입는다. 수령 800년을 너끈히 살아낸 장수동 은행나무의 위용은 황금빛으로 잎이 빛날 때다.  길어봤자 100년이 아득한 우리네 한 생은 가뭇없이 사그라지는데 800번의 가을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장수동 은행나무는 건재하다. 오래 살아 경외심으로 바라보는 노거수가 전국에 수십 그루가 있을 테지만 은행나무는 특별하다. 가을의 운치를 담당하는 역할로 은행나무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다. 

전영우 국민대 명예교수가 신동아에 기고한 ‘미국 최고령 은행나무가 경북 청도 은행나무 후손?’이란 글을 읽었다. 흥미로웠다. 은행나무는 식물군의 분류에서 유아독존의 독특한 고유종이라 한다. 고사리류와 침엽수의 중간쯤 되는 화석식물로 수천만 년 세월이 무슨 대수냐고 하는 것 같다. 마지막 빙하기에 전멸하다시피 한 은행나무는 멸종의 위기를 맞았다. 중국 남쪽 땅 귀퉁이에서 명맥을 이어가던 은행나무는 한반도와 일본을 거쳐 유럽인의 손에 이끌려 유럽대륙과 북미대륙으로 대항해를 시작했다. 

전영우 교수가 북미대륙 최고령 은행나무가 있는 미국 필라델피아 바트램 식물원을 찾아간 이야기가 감동이었다. 조선 땅 청도에서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옮겨진 묘목의 후손이 다시 영국 땅에서 싹을 틔웠고 그 묘목의 일부가 대서양을 건넜다는 이야기다. 바트램에 있는 북미 최고령 은행나무는 230여 년의 나이를 살고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 대부분의 조상이 한반도이다 보니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용문사 은행나무, 세계에서 가장 굵은 반계리 은행나무, 세계에서 옮겨 심은 가장 큰 용계리 은행나무가 모두 우리나라에 사는 노거수 은행나무들이다. 

2010년에 중국, 한국, 일본, 유럽, 미국의 노거수 은행나무 145개 개체의 DNA 유전자를 분석해 은행나무가 세계로 뻗어나간 경로를 추적한 연구 논문이 발표됐다. 청도에 있는 6번 은행나무의 유전자 체계가 유럽 여러 나라에 식재돼 있는 은행나무의 유전자와 거의 일치했다. 반면에 중국, 일본의 조사목과는 유사성이 미미해 혈통의 뿌리가 한국임을 입증했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직원으로 일본에 파견 근무했던 엥겔베르트 캠퍼(Engelbert Kaempfer·1651~1716)가 1695년 암스테르담으로 귀국하면서 일본 은행나무의 종자를 유럽으로 가져왔다는 학설이 굳어져 있었다고 한다. 

청도군 매전면 하평리에 있는 6번 조사목 은행나무는 수령 500여 년의 암나무다. 청도와 가까운 김천의 2번 조사목도, 구미에 있는 4번 조사목에서도 청도 조사목과 유전적 유사성이 없어서 지구상에 퍼진 은행나무 원류가 청도 6번 조사목이라는 사실이 신비했다. 매년 가을이 깊어질 때면 문우와 장수동 은행나무를 찾아간다. 소설적 영감을 얻는 장소라 가을이 익어가면 우리의 글도 익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찾는 장소다. 경건한 숨으로 올려다보게 되는 은행나무는 800여 년의 세월을 부풀리지도 넘치지도 않아 그 자리 그대로 유구하다. 

풋 설은 나이는 오래 전이라 농익을 만한 세월을 산 것 같아도 흘려보낸 것에 애틋해하는 가슴에 은행나무의 위안이 필요해진다. 800년 은행나무의 품은 넉넉하고도 넉넉해 가지 뻗은 공간이 사방 어느 곳에서 바라봐도 아름답다. 열정의 자오선은 일탈을 부추기는 치기를 보이다 제 풀에 잦아들고 가을색 풍만한 장수동 은행나무는 잎을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내내 자기 이야기로 수다스러웠던 계절이 갔다. 생각을 완성하게 해 주는 계절이 성큼 들어선다. 은행나무 너른 품 앞에 공손하게 앉아 덜 삭아진 감정이 버겁지 않기를 바라본다. 타의의 손에 이끌려 만리를 항해해 낯선 땅에 뿌리내린 이 땅의 은행나무. 가뭇없다 하지 않은 결기가 한류의 시작이 된 것 같다.

기호일보, KIHOILBO

▶디지털 뉴스콘텐츠 이용규칙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