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전재학 제물포고 교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날로 심화되는 갈등과 반목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복합적인 요인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본다. 우리의 모든 생각의 기준이 선과 악, 진보와 보수, 옳음과 틀림, 부와 빈곤, 승자와 패자 등등 이분법적인 사고에 의해서 구분지어진다. 건전한 중도 입장은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닌 사이비로 간주된다. 여기엔 자신만의 아집과 과도한 확증편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현재 모습은 결코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예컨대 주말이면 서울 도심가를 양분하는 민심을 보라. 올해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창조했다. 광화문과 서초동이란 광장민심이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붓고 나 아니면 너, 우리 아니면 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우리 편끼리만 나누고 소통하고 다른 편에게는 등을 돌리기 일쑤다. 말을 섞지 않을 뿐 아니라 만나는 일도 어색하다. 그러니 지금 우리 세상은 막말과 폭력, 차별과 혐오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된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 정치와 언론에 책임을 묻지만 뾰족한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혹시 우리 모두가 거쳐 온 ‘교육’에 실마리가 있지는 않을까, 자문해 보자.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에는 ‘한 아이를 기르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마치 아프리카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는 가정과 학교, 마을과 사회가 모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교육은 학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물론 학교가 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지만, 한 사람의 인성을 길러내는 일을 학교에만 기대할 수가 없다는 그들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아이들은 학교에 고립돼 있다. 학과목을 따라가느라, 세상과 단절돼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가 없다. 삶의 맥락을 익힐 방법이 없는 것이다. 교육행정은 일반행정과 따로 진행된다. 학교에서 배운 다음 사회에 나오면 처음부터 다시 배우라고 한다. 살려고 악착같이 공부했는데, 진짜로 살려면 다시 배워야 한다. 얼마나 어설프고 한심스러운 일인가?

작금 우리의 학교 모습을 살펴보자. 학교에서는 사회에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기 어렵다. 학교 밖 현실을 느낄 겨를이 없다. 교과목에 매달려 세상을 배우지 못한다. 그러니 주장과 선동에 휘둘리고 가짜와 막말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배움에서는 풍성한 생각과 다양한 태도, 다수의 접근방법과 싱싱한 토론 양식을 익혀야 한다. 

학교가 사회를 향해 문을 열고 지역공동체와 함께 가르쳐야 한다. 지역에는 대학, 지방자치체, 도서관과 미술관, 그리고 다양한 직업군과 산업현장이 존재하지 않는가? 지역공동체가 연합해 살아 숨 쉬는 교육을 만들어 갈 수는 없을까? 학생들이 학창시절부터 교과목과 함께 사회를 배우고 세상을 접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교육이 돼야 한다. 어렸을 적부터 생각하고 함께 고민하며 토론하고 어울려 타협해 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우리는 교육의 역할과 책임을 토로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늘 겉돈다. 고질병이다. 교육이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그늘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교육을 살리려 다양한 정책을 펼친다. 하지만 소위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면은 속 빈 강정이다. 형식에 치우치고 포퓰리즘에 의해 좌우된다. 이는 말은 앞서고 저마다의 이익과 기득권을 놓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교육을 대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교육 전문가를 자처하지만 현실은 학교 교육의 실상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의 트라우마나 부정적 인식으로 현재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제 인식을 달리하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교육은 학교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육에 모두가 나서야 한다. 이것이 우리 교육을 살리는 길이고 우리의 미래가 달린 중차대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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