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세우고 집짓느라 메운 터 바다까지 이어지는 물길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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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세우고 집짓느라 메운 터 바다까지 이어지는 물길 튼다
3. 산업화 그늘에 묻힌 승기천 상류
  • 박정환 기자
  • 승인 2019.11.08
  • 1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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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기천의 맨홀 속 현재 모습.
승기천의 맨홀 속 현재 모습.

 

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어야 축을 끼울 수 있으매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빚은 그릇은 그 속이 공허해야 그릇 구실을 할 수 있다. 문과 창문을 내어 만든 방은 빔으로 해서 방 노릇을 한다. ‘유(有)’가 이로울 수 있는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는 한사코 ‘채움’을 고집했다. 누군가의 채우는 기쁨은 누군가의 앗기는 아픔의 대가였다. 승기천 상류가 그러했다. 채우고 또 채웠다. 채움의 누적은 마침내 개천의 본성마저 빼앗아 갔다.

인주대로
인주대로

승기천 상류의 아픔은 1960∼1970년대 주안지구산업단지라는 채움에서 비롯했다. 인천시는 1965년 미추홀구 주안동을 주안공업지구로 낙점했다. 소금을 만들수록 빚만 느는 대한염업㈜의 주안염전(264만㎡)을 메워 산업단지를 만들자는 상공인들의 요구가 있었던 터였다. 제2수출공단(67만7천690㎡)과 기계공단 제1단지(32만7천470㎡), 2단지(69만1천㎡), 3단지(65만4천900㎡), 비철금속공단(41만8천377㎡) 등이었다.

1970년 말 1m 높이로 흙을 돋아 공장들이 들어올 터를 다 닦아 놨다. 외상으로 염전을 사들여 산단을 마련했지만 막상 입주업체들이 없었다. 주안5공단으로 이름을 바꾼 제2수출공단은 당초 30개 업체가 들어올 예정이었다. 정작 입주업체는 단 1곳뿐이었다.

까닭은 입주예정업체들의 자금 압박이었다. 대한염업이 판 땅값은 3.3㎡당 1천 원이었다. 분양가는 제1기계단지 3천200원, 제2기계단지 3천400원, 제3기계단지가 4천500원이었다.

수봉산 주안2동
수봉산 주안2동

겨우겨우 조성됐지만 주안산단은 인천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1965년 30.7%였던 제조업은 1975년 59.1%, 1980년 62.3%로 치솟았다. 1965년∼1970년 연평균 28.3%를 기록한 인천의 성장률은 전국 평균(28.1%)을 앞질렀다. 1970∼1980년 역시 인천의 연평균 성장률은 30%로 전국 평균(29.5%)을 웃돌았다.

전국 평균 성장률보다 앞선 인천의 경제성장은 인구 유입을 불렀다. 인천 총 가구 중 미추홀구의 비중은 1969년 34.1%, 1972년 37.3%, 1979년 44.1%를 차지했다. 1963년 28.4%에 불과했던 총인구 중 미추홀구가 차지했던 인구는 1969년 34.0%, 1972년 36.8%, 1977년 42.0%로 상승세를 탔다. 산업단지 생산활동이 절정을 이뤘던 1981년에는 46.2%까지 올라갔다. 물론 당시의 미추홀구는 지금의 남동구와 연수구 등을 아우르고 있었다.

주안공단
주안공단

 

1969년 미추홀구의 인구증가율은 10.7%였다. 그때 동구와 북구(부평구·서구·계양구)의 인구증가율은 0.78%, 4.49%였다. 

 

숭의동과 도화동, 주안동, 간석동 등지는 살 집이 부족했다. 1970년대 전 기간 인천의 주택보급률은 53∼57%를 넘지 못했다. 임금이 낮은 노동자들은 판잣집과 쪽방, 벌집, 비닐하우스 등 무허가 주택에서 살았다. 무허가 주택은 1967년 9천836동, 1969년 1만1천679동, 1979년 3만845동으로 계속 늘었다.

시는 집이 부족하자 주안 일대에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벌였다. 제일시장 삼거리∼옛 시민회관 일대 주안1지구(86만8천30㎡·1965∼1973년), 인천기계공고∼인하대학교 일대 고속1지구(348만9천41㎡·1968∼1978년), 도화오거리∼주안역 일대 고속2지구(372만7천531㎡·1968∼1980년), 옛 법원고가사거리∼남인천전화국 일대 주안2지구(67만3천81㎡·1970∼1976년) 등 사업을 벌였다.

또 승기천 상류가 지나갔던 승기사거리∼인천고∼제물포여중 일대 주안3지구(125만8천36㎡·1974년∼1976년)를 마련했다.

인천기계산업단지
인천기계산업단지

 

미추홀구에서 아파트가 등장했다. 1975년 건립돼 2000년 철거된 도화동 수봉근린공원 자락의 AID아파트였다. 5층짜리 10개 동, 42.97~49.58㎡ 규모의 500가구 단지였다.

 

1980년대 초까지 여러 아파트가 건설됐다. 그 중 가정법원 맞은편 주안주공아파트는 54개 동 2천400가구로 남동구 구월동 구월주공아파트(현재 힐스테이트) 다음으로 가장 큰 단지였다. 2008년 재개발로 주안 더 월드스테이트 아파트로 바뀌었다.

시장(市場)도 늘었다. 1970∼1980년대 미추홀구에만 22곳이 생겼다. 인천 다른 지역에서는 같은 기간 33곳의 시장이 형성됐다. 신기시장이 대표적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쌍용아파트 자리에 있던 진흥요업(옛 중앙도자기) 정문 앞에 푸성귀를 내다 팔기 시작했던 골목이었다가 1987년 전통시장으로 커져 문을 새로 열었다.

승기천 상류는 1984년 6월 복개공사 착공 이전까지 논들을 가로지르는 개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승기천 상류에는 ‘장다리’라는 다리도 있었다. 1960년대 내지 1970년대 초까지는 이 다리 근처 논에 물을 대어 겨울철 스케이트장으로 쓰기도 했다. 지금의 서울여성병원 근처다.

승기천 상류의 물길이 복원된다. 용일사거리∼승기사거리(옛 동양장사거리) 2㎞ 구간이다. 도로  차로를 줄여 녹지공간을 확보하고 생태하천을 만든다. 물길을 살려 승기사거리 일대 침수 문제도 해결한다. 복원된 물길에는 지하철에서 나오는 물을 흘려보낸다. 승기천 상류의 유지용수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시는 보고 있다. 차로 축소에 따른 교통 문제도 용일사거리∼승기사거리 일대 보도가 다른 곳보다 넓어 차로 축소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게 시의 입장이다.

승기천은 인천의 산에서 발원해 인천 바다로 나가는 유일한 하천이다. 그만큼 인천을 상징하는 하천이다. 승기천 상류 물길 복원은 이 정체성을 살리는 것이 관건이다.

허종식 균형발전정무부시장 "문화와 역사가 어우러진 이야기가 있는 승기천으로 복원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박정환 기자 hi21@kihoilbo.co.kr  

사진= <미추홀구 제공>

<인천시하천살리기추진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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