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계봉 시인
문계봉 시인

입동(立冬)이란 절기가 이름값을 톡톡히 한 며칠이었습니다. 예고 없는 추위는 당혹스럽지요. 입동도 입동이려니와 대학입시가 가까워오면 유순하던 날씨가 갑작스레 추워져 그렇잖아도 긴장한 아이들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라는 경고일까요. 하지만 입시추위는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촌스럽지만 뜨악하지는 않습니다. 절기상 겨울로 접어들었으니 왜 갑작스레 호들갑이냐는 (겨울에 대한) 가을의 타박도 무색해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때가 되면 가야할 것은 순순히 자리를 비워주고 와야 할 것은 겸손하게 빈자리를 채우는 자연의 이 같은 순환은 늘 정확하고 빈틈이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러한 자연의 순환에 자신의 보폭을 맞추며 기꺼이 순응하고 미련 없이 양보하는 삶을 삽니다. 저 들판의 사소한 들꽃이나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조차도 피고 져야 할 때와 구르거나 머물러야 할 곳을 어김없이 지킵니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깜냥을 망각한 채 도도한 자연의 순환을 자꾸만 거스르려 하는 거지요. 인간만 없다면 지구의 자연은 지금보다 훨씬 안전하고 많이 아름다워질 게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왜 이렇게 지구공동체들에게 천덕꾸러기 밉상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제동장치가 파열된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욕망과 서로에 대한 과도한 혐오 때문일 것입니다. 거친 대자연의 삶을 견디기 위한 최소한의 공격(방어)성과 종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본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인간만이 만족을 모릅니다. 인간을 제외한 뭇 생명들은 짐승이든 나무든 서로를 혐오하지 않습니다. 영장류인 인간만이 서로를 혐오하고 시기하고 끝내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들입니다. 

노선과 세계관이 달라서 이뤄지는 정치적 혐오, 성별이 달라 이뤄지는 남녀 간의 혐오, 사는 곳이 달라서 이뤄지는 지역 간의 혐오, 인종과 종교가 달라서 이뤄지는 혐오, 사는 형편이 달라서 이뤄지는 혐오,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피해의식으로서의 혐오 등등 인간 세상의 혐오는 인간의 수만큼이나 그 종류도 양상도 다양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혐오하는 동물이라고 수정해서 말해야 할 지경입니다. 

선배 기형도 시인의 시 중에 ‘질투는 나의 힘’이란 시가 있습니다.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힘’이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몹쓸 완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자신을 한 차원 더 고양시켜주는 반성적 동력 혹은 성취동기로서의 자극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자기보다 우월한 상대를 바라보며 질투를 느끼는 것은 따라서 무척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이겠지요. 하지만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나보다 약하거나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혐오하거나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상대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 일, 멸시와 해코지를 통해서 상황을 역전시켜보려는 무모한 시도는 당사자나 상대방 모두를 파국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걸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질투와 혐오는 분명 다른 층위의 개념입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오늘 우리에게는 힘이 되는 반성적 각성으로서의 질투는 없고 파국으로 함께 가는 혐오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정의롭지 못한 것, 민주주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인간의 기본적인 덕성조차 부정하려 하는 일련의 흐름들에 대한 비판과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 실천은 생경한 혐오와 구별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애초에는 건강한 비판에서 출발한 자신의 주장조차 어느 시점부터인가 논리적 정합성도 없고 도덕적 정당성도 상실한 채 혐오만 남은 그악스런 비난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돌아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신독(愼獨)의 자세만이 야만적인 혐오와 자기 성찰로서의 질투 혹은 각성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며 마침내 도덕적 정당성 또한 확보할 수 있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투는 일단 자신의 부족함을 전제할 때 나오는 감정입니다. 다만 그 부족함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채우려 하지 않고 시샘만 하게 될 때 그것은 혐오로 변질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나의 혐오를 동일한 수위의 또 다른 혐오로 덮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피차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혐오의 악순환이자 치킨게임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질투의 변증법을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혐오와 질투를 정확하게 변별하고, 질투의 긍정적 힘을 통해 개미지옥 같은 혐오의 현실을 벗어나야 할 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질투는 나의 힘’이란 말을 환하게 웃으면서 서로에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나에게도 여전히 ‘질투는 나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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