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눈이 내린 어느 겨울날 저녁입니다. 상점 앞을 걸어가다가 그만 미끄러져 넘어졌습니다. 두꺼운 옷을 입은 탓에 다친 곳은 없었습니다. 옷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내고 가던 길을 다시 걸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치자 화가 났습니다. ‘아니, 장사를 하려면 자기 가게의 문 앞은 쓸어놓아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러자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가게 주인이 미워졌습니다. 다시는 그곳에서 물건을 사지 않겠다는 각오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최소한 두 번 이상은 걸어 다녀야 하는 그 가게를 지날 때면, 그때 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무리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더라도 그 장소에만 가면 왠지 불편해지는 겁니다.
밤새 눈이 왔다는 것, 미끄러져 넘어졌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사건’에 불과하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불쾌해진 것은 내 생각이 만들어낸 허구입니다. 그 허구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류시화 시인의 산문집인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문답이 있습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누군가의 화살에 맞으면 아플까?" "네, 아픕니다." "만약 똑같은 자리에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면 더 아플까?" "네. 훨씬 더 아픕니다." 제자의 이 말에 스승은 이렇게 답해줍니다. "살아 있는 한 누구나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한 감정적인 고통인 두 번째 화살은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첫 번째 화살은 ‘사건’입니다. 사건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외부에서 ‘나’에게로 느닷없이 다가온 것이지요. 사기를 당한 것도 사건이고, 사업에 실패한 것도 사건입니다. 실연을 당한 것도 사건이고,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한 것도 사건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게 되고 때로는 후회와 함께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첫 번째 화살을 맞은 사람들은 두 개의 선택지 앞에 놓입니다. 하나는 나에게 화살을 쏜 상대방을 원망하는 겁니다. 내가 낙선한 것은 경쟁자 때문이고 내가 실연을 당한 것은 그 사람 때문이라고 여기는 순간부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를 더 아프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동안의 아름다웠던 추억은 모두 추악한 기억으로 바뀌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가 가식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수록 사실은 내가 더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화살에 맞은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화살을 맞았다는 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겁니다. ‘내가 사기를 당했구나,’ ‘내가 사업에 실패했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그때부터는 다시 일어설 방안을 모색하게 됩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선택입니다. 첫 번째 화살이 외부에서 내게로 온 화살이라면, 두 번째 화살은 내가 나에게 쏜 화살입니다. 문제는 두 번째 화살이 더 아프고 더 절망스럽다는 겁니다.
우리를 불행으로 이끄는 것은 첫 번째 화살이 아니라 사실은 두 번째 화살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신도가 틱낫한 스님에게 "피안에 도착해서도 여전히 고통을 경험합니까?"라고 물었더니, 스님이 답해주었습니다. "물론이지요. 경험합니다. 그러나 피안에서는 그 고통을 다루는 기술을 알고 있으니 그 고통을 행복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습니다."
고통을 다루는 기술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의 삶은 사건의 연속이어서 첫 번째 화살이 수시로 날아 들어와 박힙니다. 마치 길을 가다가 눈길에 넘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 또는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면 두 번째 화살을 맞지는 않을 겁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삶이 스님이 말한 고통을 다루는 기술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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