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고려의 충신이자 주자학의 거두 정몽주는 경남에서 태어났다. 진사문과에 등용하고 익양군까지 올랐다. 우리에게 주자학을 처음 알린 사람은 고려의 안유였다. 유교에 온화를 근본으로 하는 주자학을 접목시킨 것도 안유가 효시였다. 안유의 쟁쟁한 문하생들이 많이 있으나 학식·기개·절조 등이 안유와 같았던 정몽주는 주자학을 주창하고 확고하게 정착시켜 놓았다. 인격·품위·학식이 높고 뛰어났던 정몽주는 외교와 군사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외교활동으로는 중국 명나라와 일본에 특사로 순방하며 친선교류에 많은 노력이 있었다. 

1372년 3월 고려의 관공선을 타고 외교사절로 홍사범과 같이 인천을 경유해 가다 명나라 근해에서 폭풍우와 파도에 휩쓸려 홍사범은 바다에 빠져 숨지고 정몽주도 배멀미까지 겹쳐 반죽음 상태에서 가까스로 회복해 명나라에 도착했다. 명나라 태조를 만났다. 중국에는 몇 차례 더 다녀왔다. 일본에서는 1년 정도 머물렀다. 1377년 9월~1378년 7월까지 머물며 외교 활동을 했다. 1281년 막강한 해양 군사력을 갖추고 있던 고려수군이 친선 방문했던 규슈하카다에 도착해 고려와 일본의 현안 등을 논의했다. 제98대 장경천황을 만났다. 

정몽주는 학자이면서도 군사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방신과 함께 여진족(옛이름: 물길족)의 활동거지 함남화주 등을 정벌했으며 이성계와 북방 오랑캐족의 침입봉쇄 작전과 전라통운봉전투에 참여했다. 고려말 이성계가 주도하는 무신의 권세에 유신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몽주는 정면으로 대응하는 주석 역할도 했으며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기도 했다. 이성계와 가까운 거리에 살던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세가 쾌유되기를 바라는 연회에 위문하고 개성 두문동집으로 말 타고 가던 중 개성 대묘리 남산동쪽 기슭에 있는 선죽교(옛이름:선지교) 위에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자객 조영규에게 참혹하게 격살당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선죽교 부근에 정몽주의 영혼을 위로하는 글귀가 있는 비각이 있다. 훗날 개성 유수였던 정몽주의 후손 정호인이 부근에 다리를 조성하고 주민들에게 그곳으로 통행하게 했다. 

개성의 숭양서원에는초상화, 포은집, 필적, 의상, 지팡이 등 정몽주의 유물과 정원에 이성계의 어필 비각이 있다. 정몽주의 문집·시·노래 등을 아들 정종성이 편수해 포은집이라 했으며 포은집은 3본으로 나뉜다. 신계본·개성본·교서관본이 있다. 1584년 선조의 명으로 유성룡이 교정 맡아 포은집을 발행했으며 1659년에 봉성에서 다시 발행하고 1720년 정몽주의 11대 손 정찬휘가 역대의 포록· 제현의 서술·시문·노래·문집 등 포은에 관한 글들을 모아 포은본집과 함께 발행한다. 포은집은 본집 4권2책, 속집 3권1책 모두 7권3책이 있다. 개성 동대문 밖 성균관에 포은집 판본이 보존돼 있다고 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개성에서 서울로 나라를 옮긴 후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숭교방을 건립한다. 조선의 첫 교육기관이었던 숭교방을 성균관 또는 반궁으로 불렀다. 1400년~1610년 사이 몇 차례 불타고 중건되고 철퇴 맞는 부침이 있었던 성균관 정원에는 정몽주의 문하생 변계량의 중건과정을 밝히는 비각이 있다. 성균관 문묘에는 당나라 헌종에게 문선왕, 송나라에서는 지성, 원나라에서는 대성이란 시호를 받은 것을 합쳐 대성지성문선왕으로 부르는 공자부터 우리의 신라에서 조선에 이르는 유학에 공적이 있는 유학자들의 신위 중에 정몽주도 있다. 중국 명나라에서는 공자를 지성선사라 했다. 

683년 공자 초상화가 처음 들어온 후 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 봄·가을 상정날 석존제례가 이어져 오고 있다. 유교와 주자학을 숭상했던 조선은 양명학의 거두 육호산 등 양명학자들을 철저하게 배척하기도 했다. 정몽주가 숨지고 124년 지난 후 영의정과 문충공이란 시호를 받은 정몽주는 1517년 성균관 문묘 서쪽 행랑채에서 49번째로 배향받는다. 

정몽주의 묘는 황해도 해풍군에 있다가 1406년 3월 경기도 용인군 쇄포촌마을의 둔덕진 곳에 개장했다. 정몽주가 숨진 직후 친족과 후손들이 개성을 떠나 인천 연수구 동춘동으로 이주해 생활하며 조선시대에 높은 관직에 오른 후손들도 있었다. 조선후기에 70여 가구가 될 정도로 정몽주 일가의 집성촌이었다. 훌륭한 인물 정몽주의 일가 동춘동 묘역을 시문화재로 지정하고 관리한다고 하니 늦은 감이 있지만 시민에게 반갑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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