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 인천대 외래 교수
김준기 인천대 외래 교수

국민연금은 국가가 아닌 국민이 주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이 노후 자금으로 엉뚱한 짓을 하고자 하는 의도와 시도가 드러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국민연금은 국민연금 납부자의 의견을 배제하고 임의적으로 기업 활동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올해 초 지금은 고인이 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대표직을 내놓게 된 것도 대한항공 지분 11.5%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배임 혐의로 기소된 조 회장에 대한 연임 반대 견해를 내 놓은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이는 수탁자책임 원칙인 이른바 스튜어드십 코드 행사로 대기업 대표가 경영권을 잃게 된 첫 사례로 오너 일가의 자발적 입장과 선택이 아닌 반강제적 판단과 결정에 의해 경영권이 박탈된 경우에 해당한다. 대기업 대주주의 위법과 탈법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따라서 국민연금이 투자 기업의 경제적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기능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국민연금은 정부를 비롯한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독립되고 오로지 수익률 측면에서만 기업 활동에 관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특정 기업이 정부의 의지에 따라 국민연금에 의해 무방비 상태로 쉽게 공격 받을 수 있는 취약한 상황에 노출돼 있다. 기금 운용이나 의결권 행사를 외부 전문기관에 맡기는 해외와 달리 우리의 국민연금은 전 세계적으로 드물게 정부가 운용하고 의결권까지 행사할 수 있는 구조이다. 얼마 전 국민연금에서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 목적을 위한 주권 행사 지침’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는 자본시장법이나 상법의 기본 규정과 충돌하는 조항들이다. 

예컨대 집중 투표제를 삭제하고, 상법상 의무가 없는 배당에 대해 위원회를 두며, 중간 배당을 실시하고 이사 자격 항목 등에 관한 규정을 만들라는 요구나 국민연금이 어느 주식을 많이 갖고 있는지를 기업도 모르고 투자자들도 모르게 해달라는 주장 등은 헌법이나 관련법에도 없는 무리한 요구이다. 기업 활동에  관여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지난번 국민연금이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선임안에 반대표를 던졌는데 도대체 국민연금이 누구로부터 이러한 위임을 받아서 마음대로 월권을 행사했는지 모를 일이다. 마치 관리인이 남의 돈을 갖고 주인 행세를 하는 형국이 빚어진 것이다. 국민연금 납부자가 아닌 관리자에게 이러한 권한은 있을 수도 없고 국민연금 납부 당사자가 총회를 열어 찬성을 의결하지 않는 한 납세자인 국민이 이런 결정권을 줄 수도 없다. 대기업의 일탈은 관련 형법이나 상법으로 충분히 제재할 수 있다. 따라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행사가 여론을 고려한 특정 기업 손보기의 수단이라는 의구심을 불식시키려면 지배구조 독립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의 스튜어드십은 외국과 달리 관제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색깔이 너무 짙다. 드루킹이 이 정권에 일러준 국민연금을 통한 재벌 통제는 성공할 수도 없을 뿐더러 가능하지도 않은 방법이다. 최순실 게이트의 일환이었던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이유로 당시 국민연금 이사장과 그 밑의 운영위원장이 징역형을 선고 받은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삼성의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국민연금의 관여를 지시했고 문형표 이사장이 그 합병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두 기업의 합병은 오히려 합병 반대가 이상할 정도로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는 당연하고 긍정적인 합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이 함부로 기업 활동에 개입함으로써 최고 운영자가 법적 처벌을 받은 것이다. 3류 정부가 1류 기업을 혼내주겠다는 행태도 시대착오적이지만 국민연금을 이용해서 재벌을 손보겠다는 의도를 갖고 스튜어드십 행사를 집요하게 기획하는 이들도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전과자 딱지가 붙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재벌 관리와 권력 행사의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다. 「중용」에서 군자는 평탄함에 머물며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을 행해 행운을 바란다고 하여 자신의 본분에 충실하라고 이르고 있다. 위험한 짓을 획책하는 이들이 눈여겨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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