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현린 주필
원현린 주필

이리(李離)는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고위 사법관(司法官), 옥관(獄官)이었다. 그는 법을 다룸에 있어 공평무사하고 엄정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지나간 재판의 기록을 다시 한 번 검토하던 중 판결을 잘못해 사람을 죽게 한 일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그는 곧 법복을 벗고 죄인의 형상으로 문공 앞에 나아가 자기를 사형에 처해 달라고 자청했다. 

문공이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벼슬에는 귀하고 천함이 있고, 벌에는 가볍고 무거움이 있소. 하급 관리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여 그것이 그대가 책임질 일은 아니오."

이리가 말했다. "저는 수장(首長)으로서 높은 관직에 있은 지 오래됐습니다만 하급 관리에게 자리를 양보한 일도 없고, 또한 많은 봉록을 받았지만 하급관리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판결을 잘못 내려서 사람을 죽이고 그 죄를 하급 관리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를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이리는 사퇴하고 문공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문공이 말했다. "그대 말대로 아랫사람이 죄를 지으면 윗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과인에게도 죄가 있다는 것이오?"

이리가 말했다. "옥관에게는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형벌을 잘못 내렸으면 자기가 형벌을 받아야 하며, 사형을 잘못 내렸으면 자기가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군공(君公)께서는 신이 가리워진 부분까지 심리하여 어려운 안건을 판결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 법관으로 임명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오히려 잘못된 판단으로 사람을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합니다."

이리는 결국 문공의 말을 듣지 않고 벌떡 일어나 위병이 들고 있던 칼에 몸을 엎드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순리열전(循吏列傳)’에 나온다. ‘순리(循吏)’는 법을 잘 지켜 백성들을 위하는 청관(淸官)을 말한다. 이를 기화로 문공은 국법(國法)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리가 칼에 엎어지다’의 고사성어, ‘이리복검(李離伏劍)’으로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가히 오늘날의 전 사법(司法) 종사자들이 깨우침의 경구로 받아들일 만한 문구라 하겠다. 

부하직원의 잘못으로 인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있으나 목숨까지 버려가며 책임을 진 예는 극히 드문 일이다. 책임은커녕 자신이 저지른 과오까지 아랫사람에게 전가하려 한다. 이런 우두머리 어디 없는가. 

되돌릴 수 없는 오판의 과오를 최소화 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의심스러운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 ’라는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그 옛날 순제(舜帝)당시에도 ‘의심스러운 죄는 가볍게 한다’했다. 고요(皐陶)가 순(舜)에게 간했다. "죄(罪)를 범했다 해도 그 범죄가 확실하지 않을 때는 가볍게 처벌하시고 공(功)의 성과가 의심스러운 자에게는 중한 상을 내리시며(罪疑惟輕 功疑惟重)"라는 구절이 「서경(書經)」에 보인다. 

형사재판에서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무고한 자를 벌해서는 안 된다"라는 등의 원칙과 주의가 없어서 억울한 재판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12월 10일, 어제는 국제연합 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정한 세계인권선언일이었다. 선언문은 제1조에서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갖고 있다"라고 전제하고, 제5조에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고문을 받게 해서는 안 되며 잔인하고 비인도적 혹은 비열한 처우나 처벌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등의 인권보장 조항을 두고 있다.

화성에서 발생했던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건이 우리 재판의 불신을 가져왔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곧 인권보장의 역사다. 지금도 누명을 쓰고 죽어가거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는 죄인 아닌 죄인들이 내 인생을 돌려달라며 울부짖는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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