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김락기 전 한국시조문학진흥회 이사장

  우리는 복 받은 민족이다. 고유의 말과 글을 가졌기 때문이다. 말은 있으나 글이 없는 민족도 있고, 설사 가졌더라도 우리처럼 뜻글과 소리글을 다 가진 경우는 드물다. 말은 그 민족 얼의 상징이며 글은 그 얼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튼실할수록 그 얼을 오롯이 간직할 수 있다. 상고사의 대가 신채호는 우리 고대 삼국이 편찬한 사서(史書)의 소실에 대해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한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말과 글이 살아 있어 그 눈물을 조금이나마 닦으면서 혼줄을 잇고 이어 한겨레 5천 년 역사를 지켜왔다. 지금은 비록 한반도로 줄어든 땅덩어리이지만 그 기백만은 정정하다. 

나는 앞선 7편의 기호포럼에서 한글은 물론 한자도 우리글이라고 추론한 바 있다. 두 글자의 기원, 근거, 학설, 활용 등등으로 그 까닭을 밝혔다. 우리말(한국어)은 크게 한글말과 한자말로 돼 있다. ‘한글말’은 순우리말의 별칭으로 써보았다. ‘순우리말’을 흔히 ‘고유어’라 하여 ‘한자어’의 상대적 개념으로 사용해 왔다. 한자어도 우리 고유어라 할 수 있기에 여기선 ‘고유어’ 대신 ‘한글말’로 썼다. 요즘에 있어 우리 표기문자로는 주로 한글을 쓰고 한자는 필요시 병기해 쓴다. 한자는 옛 문헌에 ‘서글(書契)’이라고 하며, 한글은 한자로 ‘韓契’로 쓰기도 한다. 또한 문어체 문자인 서글은 음글이요, 구어체 문자인 한글은 양글로서 서로 음양의 조화로 기능한다. 서글 즉 한자는 근래 한 반세기 동안 중국에서 간체자에 밀린 반면 한국에서는 온전히 살아 있다. 이는 원래 우리 것이라는 반증이다. 

그 옛날 우리 풍토에 우리 선조가 만든 문자로서 우리 발음과 새김에 알맞기 때문이다. 가림토에서 비롯된 한글은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한자의 발음기호로서의 역할도 했다. 그만큼 두 글은 밀접하게 맺어져 있다. 대옥편을 편찬한 장삼식은 "한문자(한자)와 정음문자(한글)는 명백히 서로 상성적인 만큼 결코 대척적이 아니다"라고 했다. 영국 런던대 한국학 명예교수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2008년도에 이미 한글뿐 아니라 한자 공부의 중요성을 설파한 바 있다. 두 글자를 국문자로 함께 사용하는 우리는 보다 풍부한 어휘력에 트인 사고와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안함로의 「삼성기」, 이암의 「단군세기」 및 이맥의 「태백일사」를 본다. 한자와 한자에서 파생된 이두문, 그리고 한글의 모태글자인 가림토는 모두 우리 선조가 만들었다고 돼 있다. 한자는 약 5800년 전 배달국 환웅천황 때 신지 혁덕이, 가림토는 약 4200년 전 고조선 가륵단군 때 을보륵이, 이두는 약 2900년 전 고조선 등올단군 때 왕문이 지었다고 한다. 3가지 문자는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른 사용 강역이나 시대상황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면서 오늘날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고래로부터 문자생활은 한자와 이두 위주로 하였고, 이두문은 근조선 말까지 쓰였다. 모태 한글 가림토는 15세기 세종의 재창제 과정을 거쳐 오늘날 한국어의 주류 문자로 발돋움했다. 지상 최고의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문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정음 28자 중 사라진 옛 문자 일부를 살려 ‘단일기능성표준한글’을 제정해 세계에 내놓아야겠다. 

이제 한글을 쓰면 애국이고 한자를 쓰면 사대라는 발상은 버려야 한다. 둘 다 우리글로서 소중함에 우열이 없다. 그렇다고 쓰기 쉬운 한글을 두고, 한자 사용을 강요할 수는 없다. 순 한글만으로는 언어생활이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분야에 선택적으로 한자 사용을 권장할 일이다. 이세들에게는 한자를 정규 교과서에서 가르치되, 한자병용은 자율에 맡긴다. 현행 한자 교과서를 선택과목으로 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의 견해를 참조했다. 한자도 한글처럼 국어기본법에 우리의 고유문자로 넣어야 한다. 왕옥철, 장문 같은 중국 학자들은 한자를 동이문자라 했다. 이를 동방문자의 뿌리라고 한 한자학계 큰별 진태하는 "한글과 한자의 장점만을 취해 쓴다면 우리나라는 문자활용의 이상국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올 9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유라시아 한글백일장이 열렸다. 혹자로부터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자학적 사치라고 극찬받은 한글,  세종의 인류 편민(便民)사상을 타고 세계 공용어로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동행을 꿈꿔본다. 앞으로 한자병용 한국어백일장이 열릴 지도 모른다. 한 수 시조로 추임새를 넣는다.

- 동행길 팡파르 -

 한자 한글 한 뿌린데
 남남으로 여겼어라
 
 반만년 질곡 속에
 우세두세 걸어온 길
 
 피붙이
 밝혀진 찰나
 데자뷔가 죄 풀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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