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이강동 인천시 중구 우현로

고려는 996년 동전을 주조할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게 된다. 금속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기술집단이 있었다. 금속을 다루는 기술력을 축적하고 발전해 온 고려국가는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품질 좋은 종이도 생산하고 있어 인쇄문화 부분도 발전시켜 온 나라였다. 인천 강화도로 나라를 옮긴 고려는 1232년 인천을 상징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상정예문을 인쇄 발행해 세상에 내놓은 문화 국가로 발전했다. 

상정예문은 고려 인종(1122~1146)때 고금의 예문들을 모아 그것을 참작해 목판본으로 1부(50권)를 발행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문자의 마멸이 심해지고 손상이 있어 최충원의 지시로 고치고 다듬는 수보과정을 걸쳐 상정예문 2부를 새롭게 발행하게 된다. 1부는 예관에 1부는 최충원의 집안에 보존하고 있었다. 고려학자 최윤의 외 17명이 모여 엮어낸 상정예문은 다시 금속활자로 28부를 인쇄 발행하게 된 것이다. 상정예문은 고려사회가 문란해지자 기강과 규율을 확립하기 위한 지침서로 활용하고자 각 지역 관아에 배부했다는 문헌만 있었을 뿐이었다. 

본인은 인천 강화에서 발행된 금속활자본 상정예문이 과연 존재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10년 동안 관련 자료들을 찾아 살펴봤다. 도중에는 일문 자료의 해석을 잘못해 영국 국립박물관 도서부에 상정예문이 소장돼 있다고 주장한 실수도 있었다. 수많은 자료들을 살펴보고 분석하고 연구한 결과가 축적되면서 본인 나름대로 상정예문을 소장하고 있는 곳을 뽑아 낼 수 있었다. 이러한 결과의 토대로 상정예문은 일본 소재 재단법인 동양문고에 있음을 본인은 확신한다고 여러 차례 밝혀 왔다. 상정예문의 주인인 인천시에 수차례 상정예문이 동양문고에 소장돼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니 교섭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일반시민이 개인적으로 찾아 나서기에는 여러 모로 어려운 일이 있으니 교섭에 적극 나서 달라고 본인은 수차례 주장해 왔던 것이다. 상정예문이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돼 있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이렇다. 동양문고 설립자 고 교사쿠는 일제강점기 일본 외무성 소속 조선총독부 한국어통역관으로 근무한 사람이다. 한국어 능통자였던 그는 우리글에 관한 책 한어통을 저술하기도 했다. 우리의 고서금속활자본을 가장 많이 수집한 사람이다. 동경제국대학 내 우리의 금속활자본을 소장하고 있던 백산흑수문고와 쌍벽을 이뤘던 사람이다. 동경제국대학은 화재로 인해 우리의 고서들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동양문고가 일본에서 가장 많은 우리의 고서 442부 1천761책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문헌의 보호자, 조선연구의 최고 열심자라는 별칭도 갖고 있을 정도로 우리의 금속활자본을 많이 수집한 사람이다. 일본도서관협회 주관으로 열린 강연회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우리의 고서 연대와 내용을 자세하게 밝혔던 고 교사쿠는 고선책보, 선책명제, 조선의 활자판본 등 우리의 고서본 목록을 저술했으며 고선책보 제1권·2권·3권은 활자로 다시 인쇄 발행해 1944년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들여 온 책이 있다. 동양문고에 소장돼 있는 우리의 고서본을 자세하게 밝히는 동양문고 총간서로 발행된 고선책보 제2권에 고려의 상정예문이 있었던 것이다. 

상정예문은 동양문고에 소장돼 있다고 본인이 확신하는 이유다. 인천 송도에서 국립세계문자박물관 착공식이 있었다. 문자박물관 착공식을 계기로 인천시와 의회에 또다시 간절하게 주장한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 동양문고코너를 제공한다는 제의도 하면서 끈덕지게 교섭해 상정예문을 구입하거나 임대 형식으로라도 빌려 와야 한다. 국립세계문자박물관관 개관에 맞춰 상정예문은 꼭 전시돼야 하므로 지금부터는 인천시와 의회의 역할이 더 막중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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